헬렌 켈러, 지금 당신은 무엇에 감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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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지금 당신은 무엇에 감사하나요?
  • 김흥순
  • 승인 2024.03.1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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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칼럼

오늘 헬렌 켈러의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다시 읽어 보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헬렌 켈러가 50대에 쓴 수필로써 '20세기 최고의 에세이'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만일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사흘을 이렇게 보내겠노라고 헬렌은 말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53세 때의 일입니다.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해준 나의 선생 설리번을 찾아가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책을 하겠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이렇게 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는 초인적 노력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1880년 6월 미국 앨라배마 주의 작은 시골 터스컴비아에서 헬렌이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때는 별 탈 없이 건강한 여자아이였지만 두 살 무렵 뇌막염으로 추측되는 심한 열병을 앓은 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니 말도 배우기 힘든 3중고의 인생이었습니다.

7살이 되기 석 달 전, 앤 설리반 선생님과 만남이 헬렌에게는 기적같은 삶의 시작입니다. 만나자 마자 헬렌을 따뜻하게 안아준 설리반은 헬렌의 손바닥에 단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헬렌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것이었으나 헬렌은 그날을 자신의 삶을 빛으로 이끈 날이었음을 기억합니다. 1887년 3월 3일이라는 날짜를 헬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앤 선생님은 헬렌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 퍼킨스 장애학교의 아이들이 헬렌에게 주려고 만든 인형을 손에 쥐어 줍니다. 선물을 받은 헬렌은 한참 재밌게 놀았는데 앤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 손바닥에 '인형'이라고 써 줍니다. 헬렌은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 장난이 재미있어 흉내내기 시작합니다. 그 단어를 애써 겨우 제대로 쓰게 되자 헬렌은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어머니에게 달려가 어머니의 손바닥에 '인형'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헬렌은 장난처럼 많은 단어를 배우게 됩니다.

'핀', '모자', '컵', '앉다', '선다', '걷는다' 등의 단어들을 배우지만 그것은 단지 놀이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앤 선생님이 단어를 손바닥에 써 준 뒤 단어에 해당하는 물건들과 연결해 주었으나 헬렌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어와 사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달이 흘러 4월 5일, 그날은 헬렌이 비로소 앤 선생님이 손바닥에 써 준 단어들이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카프카의 도끼가 머리를 찍어내듯 깨우치게 됩니다.

앤 선생님과 헬렌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우물가에 이르자 선생님은 펌프질을 해서 물이 콸콸 쏟아지게 한 다음 헬렌의 왼손으로 쏟아지는 물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는 오른손 위에 재빨리 '물'이라고 썼다. 헬렌은 가만히 선생님의 손끝이 그리는 글자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때 헬렌은 알게 된 것이다. 왼손에 쏟아지는 물이 오른손바닥 위의 '물'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다. '아하'의 순간.

'아하'의 순간 이후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도약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수준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독법을 획득한 것이다. 이 깨달음의 순간을 통해 새로운 운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녀는 꿀처럼 달디 단 배움의 세계로 들어선다. 8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녀는 결코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으나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존재로서 어두운 정신을 환하게 불 밝히는 삶을 살다 지구별을 떠났다.

태어난 지 열아홉 달 만에 시각과 청각을 잃고 혼자만의 세계에 유폐되었으나 앤 설리반 선생님의 손을 잡고 밝은 세상과 다시 연결된 것이다. 그녀는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어둠과 침묵의 세계를 뚫고 나왔다. 일곱 살 이후로 헬렌은 마치 굶주린 아이처럼 게걸스럽게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는 독서를 통해 자신과 사회와 세계를 통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하버드대 부속 여자대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한 5개의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운명에 시달렸던 그녀가 누구보다도 밝고 적극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기적을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입니다. 그녀는 '내가 만약 대학의 총장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당신의 눈을 잘 쓰는 법'을 개설하여 이전까지 알아채지 못하는 '무딘 감각'을 깨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즐거운데 직접 본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러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적게 보는 듯합니다."(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263)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정적 우아함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동적 우아함을 보는 건 얼마나 감동적일까!"

그녀는 불행하고 비참한 광경에도 눈을 감고 외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이므로. 그것에 눈감는 것은 마음과 정신에 눈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묻습니다. 만약 당신이 갑자기 장님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운명에 처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때서야 당신은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세계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헬렌은 보이지 않는 장님이기 때문에 자기와 달리 시각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의 사용법을 알려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절망을 잘 알 것이고, 보인다는 것의 축복도 절절히 체험했을 것입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시오. 내일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새의 지저귐과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를 들어보시오. 내일이면 촉각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사람처럼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들을 만져보시오. 내일이면 후각도 미각도 잃어버릴 것처럼 꽃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시오.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시오. 이 모든 감각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시오. 그 중에서도, 모든 감각 중에서도 당신의 시각, 세상을 그저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온마음으로 절절하게 깨달아보시오.”

그녀가 깨달은 이 모든 사랑을 우리는 고마움과 감사함도 없이 값없이 받고 사용중입니다. 

헬렌의 친구가 어느 날 숲을 산책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글쎄, 특별한 게 없던 걸."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헬렌은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눈을 뜨고 세상을, 그 아름다운 숲을 바라보고 온 친구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그녀에게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글쎄, 특별한 게 없던 걸. 우리는 삶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일수록 죽음을 상상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 이러한 무심함이 우리가 가진 재능과 감각의 쓰임새를 한정적으로 특징지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들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는 건 귀머거리이고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아는 건 소경이고 특히나 후천적인 이유로 청각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헬렌 같은 사람이 가질 그 절박함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감각은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재능도 없습니다. 무릇 인간은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순간순간이 축복이요 감사임을 깨닫고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내게 주어진 재능과 건강과 감각에 감사합니다. 헬렌이 내게 준 크나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거저 받은 은총을 잊고 삽니다. 몸, 피부, 귀, 눈 등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중요한데도 당연하게 여길 뿐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일상을 단 하루만 살아보는 것이 평생소원일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지만, 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됩니다.

‘감사’없는 인생은 동물보다 못한 인생입니다. 감사는 신뢰와 믿음과 직결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는 믿음이 감사의 마음을 솟구치게 합니다.

2020년 가해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선악과를 건들지 않으려면 생명나무를 바라봐라> 복음: 마태오 21,33-43.45-46를 설명하신 전삼용 노동자의 요셉 신부님은 감사함에 대해 다음처럼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신 것을 믿는지 살펴보셨습니다. 바로 선악과나무를 당신께 바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봉헌해야 했던 선악과나무까지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수확철이 되면 소출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받으러 온 하느님의 외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따지자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나 소작인들이 바쳐야 하는 소출의 일부는 ‘십일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까요? 겉으로는 잘 바쳤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이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자신들의 주인의 아드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감사했다면 아드님도 존경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는 아드님을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아드님을 빼앗아 소출을 내는 백성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을까요? 내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그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가 바치는 선악과인 빵과 포도주에 담겨 오십니다.

감사의 마음이 생기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다 지옥행임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성체로 들어오셔 사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면 됩니다. 만약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손을 대기 전에 그 옆에 있는 ‘생명나무’를 볼 눈이 있었다면 선악과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무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주셨으면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불만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옆에서 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듯이, 내 안의 생명나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믿읍시다.

구원은 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를 가치 없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습니다.

 

김흥순
천주교청년연합회 민주화 활동
민통련 민족학교 1기 아태 평화아카데미 1기
전 대한법률경제신문사 대표
사단법인 세계호신권법연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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