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환대의 집] 피터 모린,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줄곧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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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환대의 집] 피터 모린,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줄곧 말을 걸었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3.06.2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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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집(House of Hospitality) 서문-3

피터의 이야기를 캐내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그의 배경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은 날마다 조금씩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9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재혼했고 가족으로 23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피터 모린은 작은 마을에서의 삶의 공동체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빵 굽는 오븐과 밀가루 공장이 있었고, 피터의 가족들은 돌로 된 집에서 양은 1층에, 가족은 2층에서 살았습니다. 피터는 젊었을 때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는 코코아 판매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파리에 도착하여 급진주의자들과 교류하고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처음 캐나다에 이주해 왔지만 그의 파트너가 사냥 사고로 사망하자 일을 포기하고 손에 들어오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철소, 탄광, 벌목장, 철도국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도랑과 하수도를 파고 도시 연립 주택에서 관리인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항상 공부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는 항상 선동가였으며, 거리 모퉁이와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하숙집, 커피숍,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피터 모린은 그 자신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선전가이자 선동가가 되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말을 들을만한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샤를 페기의 글스기 영향을 받아 짧은 문구로 글을 썼습니다. 그의 문장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피터는 항상 주머니에 이렇게 써놓은 글을 잔뜩 가지고 다녔고, 그것을 인쇄하고 싶어서 가톨릭 신문사과 잡지사 사무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등사하여 직접 배포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발적인 가난과 자비의 행위를 강조했으며, 스스로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배우고, 모든 사람이 평신도사도직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었으며, 성인이나 종교적 천재들이 지녔던 단순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보웨리(Bowery)에 있는 샘아저씨(Uncle Sam)의 호텔에서 하룻밤에 50센트의 방값을 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전국을 여행하며 대학과 신학교에서 연설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허름한 집에서 살고, 버스 정류장에서 잠을 자고, 그 나라의 "스키드 로우"에 있는 거무스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주머니에 있는 책만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글을 쓸 책상도, 사무실도, 사실 전국에 있는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 외에는 집도 없습니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완전히 단촐한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뉴욕 주 트렘퍼 산 근처에 있는 소년 캠프에서 4년 동안 일하면서 겨울에 얼음을 자르고, 바위를 채석하고, 캠프 주변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보수로 일했지만 뉴욕에 왔을 때 수용소를 담당했던 스컬리 신부는 그에게 하루에 1달러를 주었습니다. 유니언 스퀘어 주변에서 몇 주간의 자극적인 토론 후에 그는 학업과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해 캠프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 세월은 그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을 위한 준비의 세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간단하고 포괄적인 행동 강령을 작성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신문, 팜플렛, 전단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선전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피터 모린은 직접적인 사ㅗ회적 행동과 자선 활동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생각햇습니다. 엔제든 무식한 자를 가르치고 의심하는 자를 권면하며 괴로움을 당하는 자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육체적인 일과 영적인 일은 손을 맞잡고 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에게 가톨릭일꾼에서 일하고 신문을 배포하는 것은 영적인 자비의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중세 시대와 같은 환대의 집이 필요했고, 그는 이 집을 "Houses of Hospitality"라고 불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가톨릭일꾼> 신문의 창간호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미국의 주교들께 환대의 집 설치를 탄원함

가난하면서
구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사회는 거지를
행려자니 노숙자니 하며
등을 떠민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자라 불렀다.

그러니까 당신이
행려자나 노숙자로 불린다 해도
실은 하느님의 사자인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로서
당신은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을
제공받아야 한다.
그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슬람교 스승들은
하느님께서 빈자에 대한 환대를 명하신다고 말하며,
이슬람교 국가들에서는
지금도 빈자에 대한 환대가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는
환대의 의무가
가르쳐지지도 수행되지도 않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잠자리가 필요한 당신이
부자들의 집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부자들의 집에는
손님방들이 있지만
그 방들은 정작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방들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하느님의 사자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빈자 환대를
자신의 의무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을 시립 합숙소에 보내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거기서는 시가
시민들의 세금으로
환대를 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털터리들에게
시가 베푸는 환대는
환대가 아니다.
납세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실업자는
시립 합숙소에 보내져서는 안 된다.
가톨릭 실업자는
가톨릭의 환대의 집에서
환대를 받아야 한다.

가톨릭의 환대의 집은
유럽에서는
호스피스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시대 이래
호스피스가 있었다.

호스피스는 무료 여관이며,
호텔은 유료 여관이다.
그리고 유료 여관 곧 호텔은
쌔고 쌘 데 반해
무료 여관 곧 호스피스는
눈 씻고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환대는,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이제 이상으로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길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주교들을 민중에게 데려가고
민중을 주교들에게 데려오기 위해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교회 제도 안에서 전승된 자선의 기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이상이 실현되었을 때
그 모습이 어떨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가톨릭운동을 통해
가톨릭교회 안에
사회 정의를 들여오기 위해
우리는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읽고 있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는
호스피스가
병자, 빈민, 고아, 노인, 나그네 등
온갖 빈자들의 의지처였다고.

원래 호스피스는
주교의 감독을 받았다.
주교는 사제들에게 지시해
이들 자선 시설의 영적, 세속적 문제들을
보살피게 했다.

436년 무렵에 개최된
이른바 카르타고 공의회의
제14조는
주교들에게
교회 부속으로
호스피스를 설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보다 더 많이는 아니더라도
그만큼은 환대의 집이 필요하다.

본당에는 사제들을 위한 집
교육을 위한 집
여가 활동을 위한 집들이 있지만,
환대의 집은 없다.

보쉬에가 말하듯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맏이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먼저 대접받아야 한다.

집이 있는 사람들은
손님을 맞을 방이 있어서
본당의 빈자들에게
거처를 제공할 수 있다.

그래도 거처를 찾지 못한
교구의 빈자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교구에서도 집을 마련해야 한다.

교구의 빈자들에게는
교구의 환대의 집에서
가구, 의복,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

교구에는 예배소뿐만 아니라
거처도 필요하다.
리버풀의 새 성당에는
성당(Dome)뿐만 아니라
구빈원(Home)도 들어설 것이다.

가톨릭 환대의 집은
무직 신자들을 위한
무료 여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사제 양성 기관 겸
직업 훈련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코르베 신부의 제안이다.

그것들은 가톨릭 신자들의
독서실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멕솔리 신부의 제안이다.

그것들은 가톨릭을 가르치는
학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코넬리어스 헤이스의 제안이다.

그것들은 원탁토론실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피터 모린의 제안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들은
가톨릭 사상이 가톨릭 운동과 결합되는
가톨릭 운동의 집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피터가 환대에 관한 그의 영감 받은 글을 큰 소리로 읽는 동안 우리에게는 아직 사무실이 없었습니다. 나는 저녁 식사 후 식탁에서, 도서관에서, 오후에는 데레사와 함께 공원에 앉아 신문 창간호를 준비했습니다.

환대에 관한 피터의 생각은 나에게 단순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중세 시대에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존재했던 환대의 집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그의 말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모든 집에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위한 “그리스도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성 예로니모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옷장에 걸려 있는 코트는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내가 수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연립 주택에 살면서 나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의 환대와 공산주의자의 자발적인 빈곤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주에 워싱턴에서 돌아와 중서부와 뉴잉글랜드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농민 대표단 회의에서 의장은 청중에게 대표단을 환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집에 빈 침대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누가 동지 중 한 명을 자기 집에 재울까요?" 그때 수백 며으이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2년 전 선원들이 파업했을 때, 2천 명이 넘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예전에 많은 친구들이 히치하이킹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동조합과 공산당 조직을 조직했고 그들은 항상 다른 노동자들의 집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가난을 나누었습니다.

피터 모린은 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회재건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내게 가톨릭교회와 가르침에 대해 고웁해야 한다고 말했고, 책과 논문, 기사 요약본을 가지고 날마다 내게 찾아와서 큰 소리로 읽거나 읽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당시 나는 여성 클럽에서 평화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매일 오후 3시까지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집에 돌아오면 피터가 나를 교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 10시까지 우리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테사와 나를 따라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다림질하고, 빨래를 해도 그는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출처] catholicwork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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