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 vs. 베들레헴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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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 vs. 베들레헴의 예수
  • 김진호
  • 승인 2019.05.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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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탄생과 ‘장벽 저편 사람들’의 기억-2

나사렛 예수 vs. 베들레헴의 예수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은 모두 예수 탄생설화에 나사렛과 베들레헴이라는 다른 두 장소를 연루시킨다. 〈마태오복음〉은 예수의 부모가 베들레헴 출신인데, 헤롯의 칼날을 피해 이집트로 갔다가 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오려다, 그의 아들로 이 땅의 통치자로 위임된 아르켈라오스도 '포악한 자'라는 소문에 갈릴래아의 나사렛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반면 〈루카복음〉은 나사렛 출신인 부모가 호적령에 따라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예수를 낳았고 이후 나사렛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세세한 줄거리는 다르지만 두 탄생설화 갈래가 공히 이 두 지명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은 예수 탄생과 더불어 두 장소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마도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이라는 것은 사실 정보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두 복음서뿐 아니라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이 두루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메시아의 탄생이나 그밖의 어떠한 종교적 상징과도 결합되어 있지 않은 생소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베들레헴’은 메시아 전통과 긴밀히 결합된 장소다. 다윗이 바로 그곳 출신인 것이다. 이후 유대아계 전승에서 메시아가 다시 올 유력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태어날 이가 메시아로 와서 대중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갈망이 대대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열망이 예수에게 투영되었다. 사람들은 그이가 자기들을 다윗처럼 해방시켜주리라고 기대했다. 대중은 예수를 그렇게 기억했고, 예수는 대중에게 해방을 주는 이로 다가갔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의 부모가 이집트로 갔다’는 〈마태오복음〉의 진술도 그이를 모세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대중의 바람을 담고 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낸 모세처럼 새로 올 모세도 그렇게 구원해 주는 이라는 갈망이다. 대중에게 예수는 그런 분이었다.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 Pieter bruegel, 1525

기원전 4년의 나사렛과 예수

시간적으로 두 복음서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헤롯 대왕 때에 탄생했다. 헤롯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이집트에 있을 때 천사가 요셉의 꿈속에 나타나서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고 말했다. 이때 예수는 ‘아기’(παῖς)였다. 유력한 영어성서들인 <Modern English Version>(MEV)나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이 각각 ‘the young Child’와 ‘the child’로 번역하고 있듯이, 이 단어는 ‘아이’라고 옮길 수 있다. 즉 12세 이하의 소년을 지칭하는 용어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에서 예수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4년 이전이다.

반면 〈루카복음〉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태수로서 재직 중에 호적령을 내렸을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시기는 헤롯의 아들로 사마리아-유대아-이두매아의 통치자였던 아르켈라오스가 축출된 이후 퀴리니우스가 이 지역에 대한 인구조사를 실시한 때를 말한다. 그 시기는 서기 6~7년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6~7년쯤 태어났다.

요컨대 두 복음서의 예수 탄생 시기는 최소한 10년 이상의 시차가 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살아간 이스라엘계 대중에게 두 시간은 메시아의 시간이었다. 만약 그 장소가 나사렛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기원전 4년의 나사렛과 서기 6년의 나사렛, 그 시간과 그 장소를 대중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 기억과 예수는 어떻게 연관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펴보고자 한다.

 

세포리스 잔해

 

기원전 4년 나사렛에서

나사렛에서 북서쪽 5~6km를 가면 세포리스가 나온다. 헤롯 대왕이 전국 곳곳에 세운 요새도시 중 하나다. 다른 요새도시들처럼 여기에도 그의 강력한 군대와 무기, 군량 및 왕에게 송달될 양곡 등이 비축되어 있었다.

헤롯 대왕은 그 전후의 다른 통치자와 비교할 때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자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왕은 지방의 마을 단위까지 행정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지방 요소요소마다 왕의 요새를 건설하여 지방이 공공연히 왕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시위하는 정도였다. 마을들은 그 요새로 왕에게 바칠 공납물을 보냈다. 그 액수는 대대로 정해진 대로 징수되었겠지만, 왕권이 강력하면 어떤 이유로든 더 많이 징수했을 것이고 왕권이 미약하면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마을은 왕에게 공납을 바치기만 하면 대체로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럴 경우 마을을 통제하는 이는 시골의 지주들이겠다. 하지만 지주들은 대체로 도시에 거주했다. 기원전 8~6세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이어지는 제국의 시대에 팔레스티나 촌락들의 70% 이상이 파괴되었고, 유대아의 경우는 5~4세기에 바빌로니아로에서 귀환한 집단이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토착집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땅의 소유권이 자주 이동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제국의 종주권도 자주 바뀌었고, 자주적 독립국가도 건설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티나의 시골도 커다란 부침을 겪었다.

이는 전통적인 지주세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또한 헬레니즘 제국의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 이후 지중해를 둘러싼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 현상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어 중소지주의 몰락과 거대지주의 대두 현상이 두드러졌다.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청지기’는 지주가 마을에 거주하지 않고 대리인이 관리하는 현상이 만연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지주의 거대화를 함축한다.

그렇다면 지주가 없는 마을에서 질서는 어떻게 관리되었을까. 주목할 것은 팔레스티나의 국가가 붕괴하고 귀족질서가 파괴되던 기원전 6세기 이후 어느 시기부터 ‘마을회당’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곳은 지주의 집을 대체하는 질서의 중심으로 발전해갔을 것이다.

한편 기원전 5~4세기 이후, 곧 페르시아-그리스 전쟁과 마케도니아의 제국전쟁 이후 지중해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급진전 될 무렵 수많은 도시와 촌락에서는 사회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많은 소(자영)농이 몰락했고 반대로 신흥자산가집단으로 부상한 적잖이 이들이 나타났다. 여기서 후자들은 이제 노동의 일상에서 벗어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생긴 여가를 이들은 어떻게 활용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현상이 있다. 왕실이 아닌 민간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대거 등장했고, 많은 대중이 그들의 지도력에 따라 정치세력화되는 현상이 현저해졌다는 사실이다. 로마에선 기원전 5세기 초 호민관 제도를 통해 대중이 정치에 개입하는 통로가 생겼고, 그런 제도에 기반을 두고 기원전 2세기 중반 형제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대중 중심의 개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또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에피알테스(Ephialtes)는 기원전 5세기에 대중친화적 사법개혁을 단행하였다.

팔레스티나의 야훼계 문화권에서도 (귀족이 아닌) 서민출신 지식인들이 대중을 이끌고 변혁에 참여한 일이 허다했다. 〈다니엘서〉 11,33의 ‘마스킬’(maskil)를 <한글새번역성서>는 “백성 가운데서 지혜 있는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을 깨우칠 것인데”라고 번역했고, <MEV 성서>도 “The wise among the people shall instruct many”라고 옮김으로써 그들이 대중출신 지도자임을 명료히 표현했다. 또한 〈마카베오상〉 2,42 “일부 하시딤 사람들이 모여 와서 그들과 합세했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고 모두 경건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에 등장하는 하시딤(hasidim)도 시골성소의 제사장인 마따디아처럼 대중출신의 엘리트를 의미하는데, 그들은 대중을 이끌어 셀류커스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을 주도했다. ‘바리사이’도 그런 사회적 계층의 대중지도자였다.

이 시기에 이렇게 대중적 지식인 주도의 대중운동이 가능했던 데는 언어효과도 있었다. 페르시아는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시리아 지역의 방언인 아람어가 제국 곳곳으로 확산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이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로 확산될 때 대중적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가 확산되었다. 이는 기원전 5세기 이후 상형문자 대신 알파벳 문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알파벳 문자의 보급은 지식의 대중화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팔레스티나에서 촌락의 중심부에 소자산가적 지식인들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들이 마을 질서의 축이 된 것이다.

자 이제 다시 기원전 4년의 나사렛으로 가보자. 그 무렵 마을은 왕에게 공납을 충실히 바치는 한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그 중심에는 소자산가적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회당이 있었다. 복음서는 이들 엘리트를 ‘바리사이’라고 묘사한다.(〈마르코복음〉 3,6) 그리고 왕의 요새에는 왕의 판무관들이 있었다. 〈마르코복음〉 3,6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에 적대하여 ‘헤롯당원’(τῶν Hρῳδιανῶν συμβούλιον)과 손잡았다고 할 때, ‘헤롯당원’은 필시 요새도시의 판무관과 그 부하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사실은 역으로 마을 안에서 바리사이들이 협조해야만 헤롯 정부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사정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데 이런 요새에는 왕의 사병집단이 주둔한다. 그러니까 요새들이 잘 작동할 때는 왕의 통치가 안정될 때다. 하지만 왕권이 심하게 흔들리거나 왕이 사망한 경우, 요새의 병사들은 보호자가 사라진 셈이 된다. 즉 중앙정치의 부침에 가장 심하게 영향받는 기관이 바로 요새의 군인들인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헤롯이 사망한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후계권을 둘러싸고 그의 아들들과 친족들, 그리고 중앙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고, 로마의 황제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핵심권력가 가까이 있는 세력가들은 모두 로마로 가서 황제의 유권해석에 귀기울이며 로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팔레스티나의 헤롯 영토가 무정부상황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아니나 다를까.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1세기 말의 이스라엘계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중 유대아 지방의 아트롱게우스(Athrongaeus) 형제들, 베레아의 시몬, 갈릴래아의 히스기야의 아들/손자 유다 등을 특별히 거론한다.(《유대전쟁사》 2,4,55~65) 이 세 명의 민란 지도자들은 각기 메시아를 자처함으로써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무력해진 헤롯의 요새들을 점령하여 무장함으로써 더욱 거대한 세력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태수 바루스(Publius Quintilius Varus)는 신속하게 출병하여 그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유대전쟁사》 2,5,66~79) 그 후 로마 황제의 칙령에 의해 헤롯의 세 아들에게 왕국이 분할 상속된다.

여기서 우리는 히스기야의 아들/손자 유다를 주목하게 특별히 된다. 히스기야는 전설적인 민란 지도자로, 헤롯이 그가 이끄는 저항세력을 진압함으로써 군주로서 우뚝 설수 있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의 아들/손자인 유다가 일으킨 봉기의 거점이 바로 세포리스라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포리스에 인접한 시골마을 중 하나가 바로 나사렛이다. 즉 세포리스의 역사는 나사렛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기원전 4년, 유다가 봉기의 거점으로 세포리스를 점거하였을 때 나사렛은 불가피하게 그 역사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많은 청년들이 메시아로 추앙되는 유다에게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사렛의 청년들도 그랬겠다. 어쩌면 예수의 아비 요셉은 그런 청년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한데 바루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세포리스는 잿더미가 되었고, 그곳의 청년들은 유다와 함께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예수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불린 것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부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이때 저항군의 일원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시골청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포리스를 잿더미로 만든 로마군의 살기어린 칼날은 나사렛을 결코 피해가지 않았다. 더욱 최악의 상상을 해보자. 로마군은 잔혹한 학살자일 뿐 아니라 파렴치한 강간범이기도 했다. 나사렛의 젊은 여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야만극은 예수를 아비 없는 전쟁터의 아기가 되게 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일까. 〈마태오복음〉의 마리아는 바로 그 시기 그곳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대중전승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마태오복음〉의 예수 탄생설화는 예수가 그때 그곳에서 진짜 태어난 아기였는지를 확인해줄 수 없다. 말했듯이 탄생설화 자체가 가장 후대에 만들어진 영웅설화이니 만큼 그 실재성을 확인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마태오복음〉 저자가 알고 있는 대중은 예수가 그때 거기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는 것, 바로 그 사실 말이다. 물론 그 대중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이의 탄생이 그때 거기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의 머릿속에 예수는 어떤 존재일까. 가장 고통이 가장 깊은 그 한복판에서 그 고통을 가장 깊이 체현한 존재, 그분이 바로 자신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믿음, 그것은 그 공동체가 깊은 고통 속에 절망하면 메시아를 갈구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이는 그런 자신들을 구원해줄 존재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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