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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감사하라, 감사가 온통 너를 안을 것이다

기사승인 2019.04.22  15: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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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20] 큰 아들의 귀환-8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내가 경험한 큰 아들 귀환 체험은 원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느 날 우리 안의 큰 아들 혹은 큰 딸의 모습과 직면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단순하다: 돌아옴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뛰어나오실 테지만, 우리도 우리 자신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고 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떻게? 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단순히 기다리기만 하고 수동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얼어붙은 분노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는 없으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신뢰와 감사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발견되고, 그분의 사랑에 의해 치유되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는 있다. 신뢰와 감사는 큰 아들의 회심을 위한 훈련이고 원칙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신뢰가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발견되도록 허용할 수 없다. 신뢰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 오라고 늘 부르신다는 깊은 내적 확신이다. 발견될 만큼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동생들보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나 자신을 비하 하는 한, 나는 발견될 수 없다. 나는 자신에게 계속 말해야 한다, “하느님은 너를 찾고 있다. 그분은 너를 찾기 위하여 어느 곳에도 갈 것이다. 그분은 너를 사랑한다. 그분은 너가 집에 있기를 원한다. 그분은 너와 함께 있을 때까지 쉴 수가 없다.”

내 안의 어두운 소리

그러나 이와 반대를 말하는 매우 강력하고 어두운 소리가 내 안에 있다: “하느님은 실제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분은 마음대로 방탕하게 놀고 집에 돌아오는 회개하는 죄인을 더 좋아한다. 결코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분은 나를 당연하게 여긴다. 나는 그분이 선호하는 아들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그분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때때로 이 어두운 소리는 너무나 강력해서 하느님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원하는 것처럼 나도 집에 돌아오기를 원한다고 믿기 위하여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요구된다. 나의 주기적인 불평을 딛고 서서 하느님이 나를 찾아 헤매고 발견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훈련 없이, 나는 나 자신에게 무한정 파고드는 절망의 먹이가 된다.

나는 찾을만한 가치와 중요성이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써, 자기 불평을 극대화시키게 되면 결국 나를 부르는 소리에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나의 자기 거부의 소리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느님께서 방탕한 나의 형제자매들만큼 나를 끌어안고자 한다는 진실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신뢰가 상실감보다 더 깊어야 한다.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신뢰의 철저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렇게 철저하고 온전한 신뢰 속에 살아가면 나의 가장 깊은 염원을 깨닫기 위하여 하느님께 향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신뢰와 함께 감사 – 원망과 반대인 – 가 있어야 한다. 원망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다. 원망은 삶이 선물이라는 인식과 경험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의 원망은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망은 항상 부러움으로 표현되고 그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감사는 “내 것” 그리고 “네 것”을 넘어서고 삶의 모든 것 이 순수한 선물이라는 진실을 주장한다. 과거에 나는 항상 감사가 받은 선물을 깨닫고 나오는 자발적인 응답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감사를 어떤 훈련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감사를 살아낼 수 있다고 여긴다. 감사의 훈련은 나의 모든 존재와 모든 가진 것이 사랑의 선물로, 기쁨으로 기념해야 할 선물로 나에게 주어졌음을 인정하려는 분명한 노력이다.

원망과 감사 사이

감사하는 훈련은 의식적인 선택이 있어야 가능하다. 나는 나의 심리와 감정이 여전히 상처와 원망에 박혀 있을 때조차 감사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수많은 기회에 내가 불평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비판을 받을 때도, 나의 마음이 여전히 쓰라림 속에 응답할 때도 감사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나의 내적 시각이 여전히 비난할 상대를 찾고 추하다고 말할 어떤 것을 찾고 있어도 선과 미에 대해 말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여전히 복수의 말을 듣고 증오로 찌푸린 얼굴을 볼 때에도 용서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웃음을 짓는 얼굴들을 바라보기로 선택할 수 있다.

항상 원망과 감사 사이의 선택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나의 어둠 안에 나타나고, 나에게 집으로 오라고 격려하며, 사랑이 가득한 소리로 이렇게 선언하기 때문이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너의 것이다.” 참으로, 나는 내가 서 있는 어둠속에 그냥 머물러 있기로 선택할 수 있다. 나보다 더 낫게 보이는 사람들을 좇아가고, 과거에 나를 괴롭힌 수많은 불운을 애도하면서 나의 원망 속에 파묻혀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나를 찾기 위하여 뛰쳐나오는 하느님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나의 모든 존재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감사하라고 주어진 순수한 선물임을 알아보는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선택은 어떤 실제적인 노력 없이 거의 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런 선택을 매번 할 때마다, 그 다음의 선택은 조금 더 쉬워지고, 조금 더 자유로워지며, 조금 더 자의식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내가 인정하는 모든 선물은 또 다른 선물을 이어서 인정하게 되고, 마침내는 가장 평범하고, 확실하게 보이고 진부하게 보이는 사건이나 만남이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의 행위는 우리를 감사로 가득 채울 것이다. 왜냐하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는 감사의 모든 행위가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신뢰와 감사는 위험과 모험을 무릅쓰는 용기를 요구한다. 불신과 원망이 나에 대한 주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조심스러운 계산과 방어적인 예측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계속 나에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나는 신뢰와 감사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신앙의 도약을 해야 한다. 나를 용서하지 않을 사람에게 부드러운 편지를 쓰는 것,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치유의 말을 하는 것 등등.

신앙의 도약이란 항상 갚음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받으려고 원하지 않으면서 주는 것, 초대받으리라고 희망하지 않으면서 초대하는 것, 붙잡아 주기를 청하지 않으면서 붙잡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아주 작은 도약을 할 때마다, 나는 뛰어나와 나를 맞아주고 그분의 기쁨에 나를 초대하는 하느님을 일별한다. 그분의 기쁨은 오로지 나만이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자매들도 찾을 수 있는 기쁨이다. 이처럼 신뢰와 감사의 훈련은 나를 찾아 나서고, 나의 모든 원망과 불평을 앗아가 버리며 하늘의 잔치에서 그분 옆에 나를 앉히려는 염원으로 뜨거운 하느님을 드러낸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헨리 나웬 webmaster@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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