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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세계, 머튼이 마르크스를 호출하다

기사승인 2019.04.22  11: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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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마르크스는 현재진행형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론>(글항아리, 2014)을 내면서 ‘빈익빈 부익부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결론을 냈을 때, 마르크스는 더욱 짱짱하게 되살아났다. 이유는 명백하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불평등 구조가 너무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2017년 세계 경제학자 100여명이 펴낸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1퍼센트 소득이 하위 22퍼센트 38억 명 소득의 2배나 된다. 상위 1퍼센트 안에서도 1퍼센트인 0.1퍼센트의 소득이 나머지 0.9퍼센트 소득 전체와 비슷하다. 국제 구호기구 ‘옥스팜’은 전 세계 가장 부유한 26명이 가진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소유한 재산과 맞먹는다고 보고서를 냈다. 대한민국 불평등 현실도 참으로 암담하다. 통계청의 ‘가계금융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상위 20퍼센트의 자산이 하위 20퍼센트 저소득층 자산에 비해 8배 이상 늘어났다. 상위 20퍼센트 보유 자산은 9억을 최초로 돌파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영성가로 불리는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도 마르크스를 잊지 못했다. 콜롬비아 대학을 다니던 이십대 시절, 공산주의 모임에 참가했던 머튼이었다. 수도자 신분으로 십 수 년을 보낸 1957년 12월 29일, 마흔 두 살의 토머스 머튼은 자신의 일기에서 마르크스를 언급했다.

“다른 나라의 경제가 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는 내 책임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무엇이 내게 이런 책임을 묻게 하는가? 누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이 물음에 정직한 대답을 하거나 답을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과연 그의 말은 옳은가?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토머스 머튼의 시간>, 바오로딸, 206-207쪽)

불평등한 세상과 관상가의 삶

세계 경제의 불평등 앞에서 머튼은 괴로워했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가난을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하늘에 계신 하느님만을 찬양하는 신앙은 거짓 신앙이다. 루카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기다리는 구세주가 “굶주린 이를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시는 분”이라고 마리아의 노래를 빌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불평등 앞에서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불평등을 깨뜨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는다. 머튼의 일기는 계속된다.

“여기에는 이용하고 착취하는 사람들과의 협력 문제가 발생한다. 투쟁이 요구되는 어려운 문제다. 지금까지 윤리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내가 아는 한 그들이 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한 역사와 경제 같은 문제를 공부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나의 ‘관상적’ 성소와 충돌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진리를 따라 사는가 하는 문제이므로 나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 사회적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근본 원리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같은 책, 207쪽)

정직한 영혼은 가슴에 닻을 내린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십 대에 머튼의 가슴에 닻을 내린 불평등 문제는 마흔 두 살 머튼의 가슴 속에도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머튼은 “사회적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 원리”라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헨리 나웬은 <기도의 사람 토머스 머튼>(청림출판, 2008)에서 “수도자로서의 그의 소명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세상을 경멸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었다.”고 했다. 요컨대 거짓 환상을 벗기는 임무야 말로 토머스 머튼의 중요 과제였다. 분명한 사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추구하는 태도야 말로 머튼이 갈망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다.

부당한 불평등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을 찾아가는 신앙인의 태도가 머튼이 생각했던 관상이며 영성이었다. 그러므로 머튼이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행위는 거짓 환상을 거부하고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을 기억해 내려는 영성적 행위로 여겨져야 한다.

토머스 머튼은 급진적인가?

토머스 머튼이 전 세계 종교인들 앞에서 마르크스를 소환했던 일도 있다. 1968년, 방콕에서 예상치 못한 감전사고로 죽기 직전에, 머튼이 맡았던 강연 주제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원의 전망’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미소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머튼은 어느 누구도 언급하기 불편할 수밖에 없는 ‘마르크스’를 꺼내들었다.

이날, 어느 프랑스 학생혁명 지도자가 “실천하는 우리도 역시 수도자라고 볼 수 있나?”라고 질문하자, 토머스 머튼은 “수도자는 본질적으로 현실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답하며 그 학생의 말에 동의했다.

 

토머스 머튼의 영성을 흔히 ‘급진적’이라고 표현한다. ‘급진적’이라는 영어 표현이 ‘래디컬’(radical)이다. 이 말을 ‘과격하다’는 의미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과격하다’는 말은 ‘폭력적이다’라는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처럼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한 사람에게 ‘과격하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래디컬’(radical)의 어원은 ‘뿌리째 파고 든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라딕스’(radix)다. 뿌리까지 파고들어 속속들이 따져 묻는 단호한 태도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그토록 공경하는 수많은 성인들이 자신의 시대를 살아갔던 태도였다. <칠층산>에서 토머스 머튼이 밝힌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본래 ‘급진적’이다.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기본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이 뿌리까지 파고들어 캐물어야 할 질문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오늘날 토머스 머튼의 말대로 자본주의 경제의 ‘환상의 가면’을 고스란히 벗겨낸 분은 다름 아닌 프란치스코 교종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자유 시장으로 부추겨진 경제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 효과’이론을 여전히 옹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러한 견해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 제도의 신성시된 운용 방식을 무턱대고 순진하게 믿는 것입니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동안, 대다수가 이 행복한 소수가 누리는 번영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시장의 절대 자율과 금융 투기를 옹호하는 이념의 산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리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발표한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 54항과 56항에 나오는 글이다. 제발 눈을 떠 앞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비통한 현실을 흐림없는 눈으로 똑바로 보라는 외침이다.

불평등 경제 앞에서 누가 굶주리고 누가 외면당하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자! 자본 앞에 무릎 꿇은 저 수많은 언론인과 정치가와 종교인들이 그 어떤 환상을 우리 앞에 강요해도 진실을 가릴 수 없다. 토머스 머튼의 영성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프란치스코 교종의 외침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경제가 불경기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불평등 경제이기 때문에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와 자리 잡았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유형선 webmaster@catholicworker.kr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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