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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축성미사, 당신이 사제로 서품된 이유를 묻는다

기사승인 2019.04.18  09: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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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만찬 성목요일; 2019.4.18] 탈출 12,1-8.11-14; 1코린 11,23-26; 요한 13,1-15/ 가난한 이들, 성체성사 그리고 사제직

사진=한상봉

오늘은 성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 후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체포되시어 유다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빌라도 앞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으며, 죽으신지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집트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탈출시켜 약속의 땅으로 해방시키기 위한 옛 파스카처럼, 세상의 죄가 지배하는 연옥형 현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탈출시켜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형 현실로 해방시켜주시기 위한 파스카 예식이 생겨난 삶의 자리입니다. 

최후의 만찬 전에 행하신 세족례가 말해주듯이 성체성사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섬김으로 일치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일치시켜 세상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과 일치와 빛을 비추임이 성체성사의 지향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목요일에는 저녁에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교구 사제들이 모두 교구장과 함께 주교좌 성당에 모여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를 성유축성미사라고 흔히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 미사에서 한 해 동안 사제들이 교구 내 모든 본당과 사도직 현장에서 사용할 예비자 성유, 크리스마 성유 그리고 병자 성유를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미사에서 실시하는 고유한 예식이 더 있습니다. 사제들의 서약 갱신 예식입니다. 사제들은 서품을 받을 때에 교구장 주교 앞에서 하느님과 교회와 신자들에게 서약한 독신과 기도와 순명의 서약을 다시 한 번 갱신합니다. 

저도 사제로 서품된 1988년부터 올해 2019년까지 서른 번 넘게 역대 교구장 주교들이 주례하던 성유 축성 미사를 참석하여 공동 집전을 했고 서약 갱신도 해 왔습니다. 교구장 주교들은 오늘이 사제들의 생일날이라며 축하도 해 주시고 독신과 기도와 순명의 서약에 대해서 강조하는 강론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날 교황이 전세계 사제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성유 축성 미사에서 주어지는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단 한 번도 상기시켜주지도 않았고 강조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똑같습니다. 연중 봉헌되는 미사 중에 독서와 복음 말씀이 완전히 동일한 미사는 이 성유 축성 미사뿐입니다. 왜냐하면 독서가 이사야 예언서 61,1-2의 말씀이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 말씀을 봉독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소명을 재확인하는 성유 축성 미사에서 독서와 복음으로 읽도록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례 정신이 정작 실제 성유 축성 미사에서는 생략됩니다. 말하자면 세족례에 담긴 섬김의 정신이 구현되어야 할 대상이 빠진 채로 섬김만 강조되고 있는 셈입니다. 

역대 교황들, 역대 교구장 주교들은 왜 한결같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느님 말씀이 사제들의 근본 소명임을 강조하지 않는 것인지 아직도 저는 잘 모릅니다. 그만큼 꽤나 부담스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내심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생략 조치는 사제들의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고 나름 너그럽게 이해해 봅니다. 청빈 서약을 굳이 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문도 품어 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족례나 주님 만찬 미사 같은 전례 형식으로나, 서품 서약 같은 교회법 형식으로 제도화시켜서 강조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삶을 오늘날에 재현하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에서나 한국 사회에서나 가난한 이들의 존재와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스런 현실은 여전히 하느님의 관심사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서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면 회피할 수 없는 관심 대상일 뿐만 아니라 하면 더 좋은 정도를 넘어서 반드시 그것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사실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명성을 얻으시기도 하셨지만 시샘과 견제도 당하셨습니다. 메시아로서 기대도 받으셨지만 현세적 해결사가 되어달라는 부담스런 주문도 받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던 노력과 실제 실천 때문에 비롯된 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은총과 축복, 도우심과 보호하심 역시 그분의 최고 관심사인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서 판가름납니다.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서른 배, 예순 배 혹은 백 배로 열매 맺을 것인지도 여기에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전체 교회 사도직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는지를 살펴보면 그 교회가 얼마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지도 당연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현실만큼이나 가난한 이의 복음화 과업이 교회에서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파견사제

 

이기우 webmaster@catholicworker.kr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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