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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 깃드는 거룩함의 영성으로

기사승인 2019.04.02  09: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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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말씀 읽기]
마르꼬 10,35-45
골로사이 3,12-17

[성 찰]

미국 주교회의의 사목교서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정의를>에서 :

”대부분의 우리들이 거룩해질 수 있는 길은 세상 속에서 가지는 우리의 성소에 달려있다. 우리는 단지 교회안에서 뿐아니라 기업분야에서, 노동운동과 전문직업속에서, 교육과 공공생활속에서 평신자의 진취적인 시도와 표양을 불러일으키고 지지할 수 있는 영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들의 신앙은 단순히 주말의 의무가 아니며 일요일날 제단주변에서 기념하는 신비에 불과해서는 안된다. 신앙은 가정이나 직장, 공장, 학교 그리고 모든 기업의 현장에서 매일 실천되어야 할 포괄적인 실재인 것이다. 우리는 생활의 현장이나 보다 넓은 공동체에서 행동하는 것과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평범한 남성과 여성들, 매일 일하러 나가고 가족을 키우며 세금을 내는 이 사람들은 시민생활에 책임을 가질 뿐만 아니라 엄숙한 내적 여정에 또한 참여하는 것이다.“

 

사진=한상봉

[초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과 가정생활, 개인생활, 봉사활동을 교회생활과 통합시켜주는 영성을 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이해해 주고 그들의 여정에 함께 참여할 사람들을 찾고 있다. 복음이 이 세계에 그만큼 관심을 두고 초점을 맞추는데 비하여 왜 우리들은 다른세계의 영성에 그토록 매력을 느끼고 유혹을 받고 있는가?

교회의 영성에 관한 강조를 이해하려면 우리 역사에 관하여 좀 아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이 세상 안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사셨던 모습은 우리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잘 일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평범한 사람들을 영적인 실재로 가득찬 식사에 모으실 때에 어떻게 일상적인 것을 일상적인 장소에서 기념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비하시키는 외부의 철학들이 곧 교회로 들어왔고 영은 좋은 것이며 물질은 악으로 생각하는 이원주의를 발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우리들의 육체는 지상에서 온 것이므로 나쁜 것이다. 성(性)은 나쁜 것이며 약한 사람들이나 빠지는 것이고 독신과 동정이 이상으로 간주되었다. 이 이원주의는 일의 영역으로 스며들어 종교적 일(기도, 전례, 성사, 설교, 자선활동)과 세속일로 구분되었다. 다른 세계에 촛점을 맞추는 수도생활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거룩함”이 이 세계로부터 분리되면서, 관심은 “내면의 세계”, 자아의 정화, 금욕주의 그리고 관상생활에 모아졌다. 신앙은 개인과 하느님사이의 사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성소, 영성 그리고 사명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사명이 아니라 본당의 사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더 우위에 둠으로써 이 이원주의의 표징을 계속 소지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거룩한 일”과 “악마적 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일과 세속적 일로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영성은 개인의 구원에 촛점을 맞추게 되었다. 개인적인 것은 사적인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구원은 하느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라기보다 초월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가장 좋은 부분에 기초하는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성은 또한 이 세계의 일상적인 현실에 근거하고 그 현실의 신비, 아름다움을 포용하는 것이어야 하며, 지금 이곳에,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부르심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강복이라는 초월적인 접근방법, 성체조배 그리고 천국에 다다르기 위한 성사들의 집행과 참여로부터 이 세계속에서 악을 극복할 필요를 인정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며 공동선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문화의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영성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은 성과 일의 종교적의미를 다시 깨달으며 성과 일을 하느님의 거룩한 창조에 참여하고 또 계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과 일은 그 종교적의미를 배제하면서 세속의 세계에 남겨두기엔 너무나 귀중한 것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일상생활의 영성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

1. 육화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놀라운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고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몸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1985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는 평신도들이 “교회와 가정, 직장에서 하는 일상적 일들과 세속활동 그리고 여가에 있어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으로 세상을 꿰뚫고 변혁시키도록” 도와주는 영성을 제창한 바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 동안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하느님의 현존과 움직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우리 각자에게 선물을 주셨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로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기도는 삶과 우리주변에서 생명을 주는 것과 고통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영성은 빨래를 하는 것, 차이를 극복하고 화해하는 것, 사랑을 하는 것, 노동일을 즐겨하는 것, 목욕탕에서 혹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도하는 것 등 모든 것을 포용한다.

2. 사적이 아니라 공동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본질적으로 공동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그것은 예수와 나 사이만의 체험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단순히 개인들의 구원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삶과 사명에 전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라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전례를 통해서도 반영되고 있는데, 전례에서 우리는 세상의 증인이 되도록 파견되기 위하여 함께 모인다. 전례는 그리스도안에서 서로가 하나되려는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힘과 싸움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가 체험에 영성의 바탕을 둔다면 그 체험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공동의 기도는 사람들의 사명을 확인하고 일상생활의 필요와 도전에 있어 그들을 지탱시켜 줄 시간을 마련해 준다.

3. 성찬례적 혹은 일상생활에 중심을 두는 것이어야 한다. 요한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성찬례적 상징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다. 예수는 가장 평범한 일상 생활 중의 한 부분을 택하여 가장 일상적인 행동 - 먹고 마시고, 손으로 만지고 씻기고 기름으로 바르고 - 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앙과 아름다움과 신비의 힘이 일상적인 것들과 행동속에 담겨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우리생활과 관계라는 일상적인 것들의 선함과 성스러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현존이 되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예수께서 애들을 키우고, 일을 하고 가르치며, 빵과 포도주를 만드는 우리의 노력안에 또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까? 삶 자체가 성스럽기 때문에 영성은 반드시 사랑과 관심에 기초를 두어야 하고, 모든 삶의 기념은 애벌레로부터 혹성에 이르기까지, 특히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여정을 기념하는 것이어야 한다.

4. 창조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나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일로부터 어떤 힘이 충전되는 것을 느껴야 한다. 창조적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가장 가깝게 느끼는 체험이며, 글을 쓴다든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든가 스웨터를 짠다든가 등 모든 일상적인 일들속에서 창조성을 느낄적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소위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 사이의 분리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비인간화시키며, 생명을 비하시키고 파괴시키는 혹은 서로를 소외시키고 분리 시키는 모든 일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상의 일과 경제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의 소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자원의 위탁 의무와 물질의 우상화라는 주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풍조에 대하여 저항의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다든가, 한 대학생이 양로원에서 봉사하는 것, 부모가 성탄선물로 아이들에게 소박한 선물을 직접 만들어준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5. 잘 들어야 한다. 우리는 큰 사건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속에서 어떻게 성령의 움직이심을 알아보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하느님은 우리의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자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또 때로는 일 자체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우리는 힘, 재물, 남성지배에 의존하는 문화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자신의 삶을 다스리고 있다. 주님을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외로운 사람들, 잊혀지고 멸시받는 사람들의 하느님으로서 만나뵙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체험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기도 속에 함께 받들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의 연민어린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형제자매들로 느껴진다. 성령은 우리를 회심과 치유에로 초대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힘보다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6. 빠스카신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성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죽음과 부활의 계속되는 순환은 우리 생활속에 서도 되풀이되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일반사회에서 고통과 죽음이란 피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범을 볼 때는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배우자들은 좋을 때나 병들었을 때에도, 직업을 잃었을 때나 서로 이익이 상반되어 갈등이 있을 때에도 서로를 사랑하기로 약속한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에 대해 죽는 순간이 바로 새로남과 성숙의 순간들이다. 부활은 우리들 삶에서 성금요일이 지난후에야만 비로서 찾아온다.

7. 계속 치유될 필요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죄를 짓는다.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자기자신을 괴롭힌다. 또 이웃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공해, 폭력, 여성과 소수에 대한 억압 등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고, 평화가 오기를 청해야 한다.

8. 이웃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개인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섬김의 생활을 하려는 애씀이다. 예수께 있어 사랑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상향을 건설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을 특히 돌보는, 정의와 평화의 투쟁을 의미한다.

아이들, 일자리가 없는 이들, 병든 이들, 노인네들은 성찬례에서 약속된 자기희생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들의 삶이 오로지 예수를 통하여 예수와 함께 그리고 예수안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의 관심은 이제 당신을 기억하고 이웃을 위해서 우리들의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시는 주님과 끊임없는 일치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나눔과 성찰]

1. 나는 본당에서의 전례가 나의 일상생활에 말해주는 바를 어떻게 느꼈는가 혹은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는가?
2. 나의 일상생활 모두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위의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행동을 위한 초대와 응답]

◦ 나의 일과 가정생활을 기도와 신앙공동체생활에 더 깊숙히 통합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까?
◦ 평신도 성소에 적절한 영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출처] <일상생활의 복음화-공동체안의 평신도>,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참사람되어 webmaster@catholicworker.kr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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