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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기사승인 2019.03.18  17: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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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7] 큰 아들의 귀환-5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동화 이야기와 달리, 돌아온 탕자 비유는 아무런 행복한 결말을 주지 않는다. 대신 비유는 우리가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힘든 영적 선택과 대면하도록 놔둔다. 그것은 하느님의 전적인 용서와 사랑을 신뢰하는가 아니면 신뢰하지 않는가 사이의 선택이다.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는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단지 탕자의 귀향으로써만 아니라 원망에 가득 찬 큰 아들과 함께 대면한다. 그런 태도는 책임을 다하는 이 종교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불평과 대면해야 했고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그들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식탁에 죄인들과 함께 기꺼이 앉을 것인가?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실제적 도전이다. 그들에게, 나에게, 모든 인간존재에게, 원망에 사로잡혀 있고 불평하는 삶의 방식에 정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도전이다.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의 원망 

내 안의 큰 아들에 대해 성찰하면 할수록, 나는 이러한 잃어버림이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더욱 더 깨닫는다. 욕망을 찾는 불장난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존재 가장 깊숙한 구석에 뿌리 박혀있는 차가운 분노로부터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것 같다.

나의 원망, 원한은 쉽사리 구별할 수 있고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파멸적이다. 나의 미덕 밑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는 어떤 것이다. 복종하고 책임을 다하며, 법을 지키고, 열심히 일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그런데 아직도 나의 원망과 불평은 신비하게도 그러한 칭찬할만한 태도에 붙어있다. 이런 연결은 자주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나의 가장 관대한 자아로부터 말하거나 행동하고 싶은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분노나 원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가장 이기심을 버리고 싶은 순간에, 나는 사랑받고 싶은 강박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과제를 잘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바로 그때에,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던지지 않는지 질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를 느낀다. 마치도 나의 고결한 자아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또 한 원망스러운 불평꾼이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나는 나 자신의 진짜 가난과 대면한다. 나는 나의 원망을 뿌리 뽑는데 전적으로 무력하다. 그 원망들은 나의 내적 자아의 토양 속에 너무나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어, 그것들을 뽑아내는 일은 마치 자기 파괴처럼 느껴진다. 나의 미덕도 함께 뽑아내지 않으면서 이런 원망들을 어떻게 솎아낼 것인가?

내가 의무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내 안의 큰 아들은 집에 돌아올 수 있을까? 작은 아들이 발견된 것처럼 나도 발견될 수 있을까? 원망으로 헤매고 있을 때에, 질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복종에 갇혀있고 노예살이처럼 의무를 살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혼자서는, 나 자신의 힘으로 온전한 나의 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큰 아들로서의 나 자신을 치유하는 것은 작은 아들로서의 나 자신을 치유하는 일보다 더 두렵고 기력을 꺾어버리는 일이다. 여기에서 자기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직면하면서 이제 나는 예수님이 니코데모에게 했던 말을 이해한다:

“내가 ‘당신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한3,7)고 말할 때 놀라지 마라.”

참으로 나 자신이 일어나게 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나는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나 자신의 힘으로, 나의 정신으로, 나 자신의 심리적 통찰로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내 마음에는 이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다. 왜냐하면 불평에 빠진 나 자신을 치유하려고 과거에 무척 애썼지만 실패했기 때문이다. 계속 실패했고...실패했다.

완전히 정서적으로 무너지고 몸도 완전히 소진될 지경까지 노력했지만. 나는 오로지 위로부터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올 때에만 치유될 수 있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헨리 나웬 webmaster@catholicworker.kr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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