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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존재의 기술까지

기사승인 2019.03.18  15: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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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에리히 셀리그만 프롬 선생님 (Erich Seligmann Fromm, 1900.3.23-1980.3.18.) 선종 39주년. 생전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1956)에서 사후의 “존재의 기술”(The Art of Being)"(1993)까지 이어진 선생의 가르침!

자신(이기주의)과 돈(배금주의)이 판치는 천민자본주의, '불타는 태양(버닝썬)'인양 광란하다
타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독립운동 100년 기념의 우리나라. 우리 삶을 쉴새 없이 무차별적으로 옥죄이는 "인간 소외"라는 소유(To have)의 침략들. 이에 맞서 힘겹게 근근히 버텨가고 있는 "사람다움"이라는 존재(To be)의 저항들!

마치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그리는듯한 경종을 울리는 말씀 !

'무한한 발전이라는 저 위대한 약속'ㅡ 자연을 지배하고 물질제 풍요를 가져 오며 최대 다수에 최대의 행복, 박해를 받지않는 개인적 자유의 약속ㅡ은 산업시대의 개막 이래 여러 세대의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 왔다. ... 위대한 약속의 영광, 산업시대의 놀라운 물질적 · 지적 성취를 마음에 그려봄으로써 비로소 그 실현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일으키고 있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산업시대는 분명히 그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 감정 ·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다.
3. 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부국에 국한되어,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들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소유냐 삶이냐>, 김남석 역, 15-16쪽, 1986년)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탐욕이라는 선천적 본성이 정복욕과 적대감을 추동하며 시나브로 변모하는 ‘자연의 변종’ 인간 종락!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내 행동뿐만 아니라 내 성격에도 관계이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 공유가 아니라 소유가 내게 쾌락을 준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내가 속여야 할 고객과 없애야 할 경쟁자와 착취해야 할 노동자에 대해 적의를 품어야 한다.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나보다 많이 소유한 사람을 시기해야 하며 더 적게 가진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의장하듯이 내 자신은 미소를 머금고 합리후적이며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임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에 대한 정열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기어이 유발할 것이다.”(21쪽)

소유의 양식(mode of having)과 존재의 양식(mode of being)은 어떠해야 하는가 !

괴테 선생이 파우스트를 통해 보여준 존재의 양식인가 !

재 산

나는 알고 있노라 아무 것도 내 것이라고는 없음을 
다만 내 영혼으로부터 막힘없이 흐르는 
사상만이 있음을.
그리고 사랑에 찬 운명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 
모든 행복한 순간만이 있음을. (35쪽)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수도원장이 가르친 '가난'하며 평화를 위해 '달리는' 존재의 양식인가 !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알지'못하며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는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84쪽)
"평화 속으로 달려라! 달리는 상태, 평화를 지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는 상태에 있는 인간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90쪽)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포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존재 양식은 어떠한가! 소유의 양식에 따라 성장주의•물질주의에 항복하여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지, 예수를 '사는'종교가 아니다"(박경미)고 고백해야 하는건가 !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동무들의 나라, ‘예수의 교회’는 아마도 식민지 시대 만해 한용운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망설일 때 보았던 ‘당신’의 얼굴과 아주 닮았을 것이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박경미,'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녹색평론제96호,2007년9월)

'소유의 양식'인가 아니면 '존재의 양식'을 따르는 사람인가?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아닌 '존재'인가? 이웃의 고통에 민감하고 고귀함의 감각을 잃지 않는 '단순한 사람'인가?

삶의 절벽에서 시나브로 늙어가는 존재의 꼬라지를 성찰합니다.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노(老)학생

 

방진선 webmaster@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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