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코의 바르티매오, 다른 하늘 아래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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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코의 바르티매오, 다른 하늘 아래 눈을 뜨다
  • 한상봉
  • 승인 2019.03.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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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20
La fe de Bartimeo (Mc 10,46-52)

바르티매오란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그 사람입니다. 예전에 저는 그저 예리코의 ‘눈먼 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제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지요. 저는 늘 길가에 앉아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푼돈에 기대서 연명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하찮은 목숨을 잇는다는 게 대수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생명이란 질기고 그래서 모진 것이 되어 목숨 가진 것들의 하루를 괴롭힙니다.

저는 태생 소경이 아닙니다. 멀쩡하게 하늘을 우러러 보고 고운 눈매로 사람을 지긋이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못 볼 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세상으로 열려 있던 마음의 눈을 닫아걸자 이내 세상은 어두워지고 눈뜬장님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어둠은 저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었습니다.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제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끼니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제게 안식을 주었고, 저는 제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어둠 속에서 뭐든 상상하며 판단하고 즐겼습니다. 차라리 그게 좋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매정한 것이어서 이해관계가 스미자마자 입에 가시가 돋고 손끝에 갈고리를 매달고 질퍽거리는 것입니다. 등 뒤에서 욕하고 앞에선 딴소리 하는 것입니다. 어리숙한 사람은 이내 상처를 입고 헤어날 방도를 모릅니다. 그러니 여기에 얽히지 않는 게 좋습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니 눈이 멀어버린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다만 그림자거나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삶에 도무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장외인간(場外人間)’이었던 셈이지요. 제가 보지 못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제가 들을 귀마저 막혀 버린 사람인양 곁에서 마구 지껄이곤 하였습니다. 저들끼리 숨어서 해야 할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저는 늙은 개처럼 누워서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혼자서 쪼이곤 했습니다. 이 세상은 저들의 세상이고, 제 세상은 어둠 속에 갇힌 채로 그런대로 자유로웠습니다.

그 권태로운 즐거움을 깨어버린 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였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한 소문이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병자와 죄인들의 친구를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가난뱅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말 때문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이런 험악하고 비열한 거리에선 눈먼 이가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진실을 알아차린 그 젊은이가 고맙고 목이 메어지더군요.

그 사람이 쳐다보는 하늘이라면 저도 한 번 보고 싶더군요.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공중의 새도 보고, 들판에 익어가는 나락도 눈으로 느끼고 싶더군요. “와서 보라”는 말 그대로 갑자기 눈이 밝아졌으면, 간절한 마음이 솟구치는 걸 어쩝니까? 그 사람이 예리코를 떠난다는데, 눈앞을 스쳐가지만 전 그분의 뒷모습인들 알아볼 수 없는데 어찌합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외칠 밖에요.

누가 말려도 소용없는 간절함. 보고싶다, 하는 애탐이 목청을 돋우게 하고 마침내 그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지요. 당연히 그분은 제 목소리 너머로 울컥이는 심정을 헤아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눈먼 자이기에 “무엇을 바라느냐?” 하시는 음성의 얕은 파장까지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의 음성이 내 혀를 열어주었고, 단박에 청했습니다. 평생 원하지 않던 생각입니다. 끔찍해서 오히려 닫아걸어 두었던 두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했지요. 당신께서 열어주시는 하늘은 다른 하늘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분의 눈빛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분은 내 눈에서 안개를 거두어내셨고, 어둠이 걷히자 앞길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 뒤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그분은 가라, 하셨지만 저는 그분이 가신 길만을 골라서 밟을 작정입니다.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파르게 나 있었고, 하늘이 휘장처럼 갈라지던 날 그 가파른 언덕 위에서 그분이 십자가 위에 달릴 때까지 저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나를 눈먼 거지라 부르지 않고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 추종자, 그리스도인 바르티매오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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