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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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교회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03.1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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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말씀 읽기] 

고린토전서 12,31-13, 8
루까 15,11-32

[성 찰]

가족이 가장 기초적인 신앙공동체라는 확신은 복음보다 앞서는 사실이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회당이 아니라 가정이 모든 종교적인 생활의 중심지였다. 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약의 교회에 관한 기초적인 묘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다.”

어떤 가족들은 그들 자신의 가족 생활보다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에 투신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한 가정의 부모가 가정이라는 수평선을 넘어 어떤 의식적인 목표나 이상을 가질 때 그런 투신의 의지가 강해진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가장 훌륭하고도 행복한 결혼과 가정 생활은 그들 자신의 관계에만 집중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부와 가족이 하나가 되어 보다 큰 어떤 일에 참여하게 될 때에 이루어진다.

 

사진출처=pixabay.com

[초점]

어떤 부부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결혼 전에 받은 충고는 결혼 초기에는 서로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라는 것이었으나 그때의 생활은 지옥과 같은 것이었다고. 그러나 결혼 생활을 자신들에게만 집중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생활은 지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주어지는 결혼 생활에 관한 충고는 대부분 개인에게 치중되어 있다. 즉 어떻게 여자를 다룰 것인가 혹은 이혼할 경우의 조건 등에 관한 것이다. 일치와 친절함은 독립과 개인의 행복을 주장하는 현대의 메시지와 상충되고 있다. 현대의 자유분방함은 대가족 제도로부터 핵가족 제도로 그리고 마침내는 가족의 부재 현상까지 가져왔다.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 오늘날 사회의 기초적인 단위로 보여지고 있다. 가족은 너무나 허약해서 도저히 사회의 기반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가족 중에서 특히 부모의 역할을 강조해 왔던 교회는 이제 보다 넒은 의미로 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독신들, 독신 부모들, 자녀가 없는 부부들, 사별하거나 이혼한 사람들, 알콜 중독자들, 불만에 가득찬 청소년들, 중년위기에 처한 부부들, 그리고 무엇인가 갈구하는 젊은 성인들 모두가 교회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가족 단위라고 할 수 있다. 대중언론 매체와 동료들과의 경쟁, 함께 식사할 시간조차 없고 빠른 생활 양식 등으로 가족들은 이제 엄청난 도전 앞에 처해 있는 것이다.

본당보다는 가족이 교회의 기본단위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상기시키신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그들과 함께 있겠다”(마태 18:20). 신약성서나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교 가족을 한 교회로 생각했다. 즉 가족이라는 교회에서 사람들은 함께 모여 빵을 나누곤 했었던 것이다. 또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1980년 가족에 관한 시노드에서, 기초적인 차원에서 가족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가족은 “기초교회”라고 불러서 마땅한 것이다.

가족 생활은 거룩함으로 불리운 생활이다. 한 부부로서 서로를 위한 사랑이 성숙하고 그러한 사랑의 외적인 표현으로서 자녀들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부부는 서로에게 대한 선물로서 그들의 사랑을 육화시키려고 한다. 자녀는 하느님께로부터의 독특한 선물이며 부부의 분신이기도 하다. 서로를 위하는 부부의 사랑이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가정 환경의 정신을 끊임없이 형성시켜 나갈 것이다.

가족 안에서 신앙은 실재가 된다. 한 아이가 세례 받는 첫번째 교회의 형태는 바로 가족이다. 가족의 식탁에서 아이들은 첫영성체 훨씬 전에 성찬례의 의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아이들은 용서와 화해를 경험한다. 가족들은 가족사 예를 들면 생일이나 졸업, 입학과 취직 등의 가족일을 성사적으로 기념할 필요가 있다. 가족 기도나 전례는 가족 생활로부터 가장 풍요롭게 떠오른다.

가정은 그리스도교적 기념이나 전례가 행해지는 가장 일상적인 장소이며, 본당은 보다 큰 그룹들의 전례가 행해지는 곳일 따름이다. 가정은 성서를 읽고 함께 기도하며, 특별한 교회 전례기를 기억하고 친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하느님의 축복을 깨달으며 갈등 후 함께 화해를 기념하는 곳이다. 이 가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을 축하하고, 자기 성숙으로 이끄는 희생과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고통을 경험한다.

어떤 부부는 결혼 초부터 가정 안에 한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자주 기도한다. 아이들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그곳에서 홀로 기도를 한다. 이런 장소는 가정이 거룩한 곳이며 가정사 모두가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 장소는 묵상과 기도의 자리이며 성서와 기타 성물을 비치해 둘 수 있다. 또한 이런 장소가 가정 안에 마련되면 그 가족이 믿는 하느님은 단지 일요일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 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양 부모는 자녀의 발육에 있어 모두 중요한 존재들이다. 부모는 각자 아이의 특별한 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화를 가진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깊은 자기 존중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는 아마도 자녀들의 종교적 성숙에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자신의 성에 관한 자각은 부모와의 접촉 경험에서 형성된다. 성과 종교적 가치관들은 가르쳐서 얻는 것보다 부모의 가치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터득하게 되는 것이 더 많다.

사람들은 삶에 눈을 뜨면서 임신, 출신, 세례, 조부모와의 관계 등 기쁜 가족사를 경험하며 또 이런 시간들은 거룩한 시간들이다. 그렇지만 어렵고 슬픈 일도 있고 또 그런 시간들을 겪어 가야만 할 때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맞벌이를 해야 하고 또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는 사회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갈등을 수시로 일으키게 한다. 부모들은 자주 다른 부모와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어떤 부부는 성인이 되어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 일에 교회가 별로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가족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덕적인 피폐가 아니라 영적 빈곤에 있다. 가족은 자주 신앙의 위기를 체험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 문화의 영적 빈곤을 치유할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가정은 남은 우리의 삶동안 그 영적인 여정을 지켜보고 또 분별해 내는 렌즈역할을 하고 그 렌즈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본당보다 가정이 종교의 사회화를 이루어 가는 더 중요한 기구라고 말한다. 오늘날 가족들은 교회보다 일과 과시적인 낭비, 성의 자유, 그리고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세속 문화의 영향을 더 받고 그 문화에 의해 복음화 되고 있다. 우리가 가족 교회의 중요성을 더 분명히 깨달을 때까지 본당은 참 신앙의 공동체라기 보다 성사를 집행하는 정거장에 불과할 것이다.

가족은 자주 사랑과 거룩함의 공동체보다는 인간 존재의 약함과 소외의 표현으로 비쳐진다. 경쟁, 거부 그리고 적대감이 사랑과 상호 관심만큼이나 자주 일어나는 곳이 가정이다. 인간적인 한계나 종교적인 성숙 모두를 위해서 가족의 영성이 정립되어야 한다. 친교와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고 서로를 배려하며, 어려운 시기에 더 충실하려는 몸짓들로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갈망이 바로 가족 한가운데에 현존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이런 모습들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니, 그분은 결혼을 교회의 성사로 만드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화해

화해나 용서는 가족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강력한 부르심이다. 예수님은 화해에 관한 가족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탕자의 아버지는 가족과 신앙을 버린 아들을 찾아 나서며 그것은 그 아들을 용서하기 위한 행위였다.

가족 간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주 작은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심한 말 한마디나,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말하고 있는데 끼어 드는 것, 약속한 것을 해주지 못한 것등이다. 또 때로는 잘못된 판단이나 오해, 불합리한 기대감이나 침묵에서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이 작은 사건들은 화해가 항상 일어나지 않으면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장벽으로 커지기도 한다.

탕자의 이야기는 용서와 화해를 가져오는데 있어 상처를 주었고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만큼 상처를 받았던 사람의 책임감도 똑같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또 어떤 때 우리는 우리자신이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화해에는 용서와 치유 두 가지 모두가 관련된다. 양쪽이 실패 후에는 치유가 필요하며 사람 안에서 서로를 치유할 힘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별로 도움이 안되는 많은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용서는 상처받은 사람보다 더 씨름하고 있는, 실패한 사람, 상처를 준 사람을 치유하려는 노력이다.

용서는 기도를 많이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자존심과 무력함, 그리고 용서가 정말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 때문에 용서를 청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존심과 상처 때문에 나에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똑같이 어렵다. 그러나 용서를 청하는 것만이 또다시 새로운 관계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청하는 말들이 치유를 가져오고 성사적 의미을 지니려면 그만큼의 진정한 마음을 담아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탕자 이야기에 담긴 교훈을 배운다. 그런데 이런 순간들은 은총보다 절망의 순간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부부나 가족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아도, 그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가족은 서로의 차이를 갖고 살 수는 있어도 무관심을 가진 채 살아갈 수는 없다. 가족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용서와 화해는 친교와 일치에 있어 불가결한 요소이다.

[나눔과 성찰]

1. 나는 나의 가족 생활에서 어느때, 어떤 점에서 거룩함을 체험했는가?
2. 가족이 기초적인 교회라는 사실을 나의 가족의 기도와 전례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3. 우리 가족 자신의 행복을 마지막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웃과의 일치를 더 지향할 때 가족 생활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식은 무엇일까?

[행동을 위한 초대와 응답]

◦ 우리들의 가족 생활을 더 그리스도교 적으로 복음화시키고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족 기도, 전례의 방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 또 나는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 가족 생활에서 용서와 치유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출처] <일상생활의 복음화-공동체안의 평신도>,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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