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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 사랑의 성사 "성적 사랑은 황혼처럼 아름다운 예술"

기사승인 2019.03.12  12: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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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안의 평신도 -3

[성서말씀 읽기]

마르꼬 10, 2- 9
에페소 5,21-33

[성 찰]

요한 바오로 2세 : <그리스도인 가정의 역할>(1981년)

가정의 본질과 역할을 그 근원에서 살펴본다면 마지막 분석은 결국 그것이 사랑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가정의 사명은 사랑을 지키고, 드러내고 통교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명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주님이 당신의 배필인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진정으로 참여하고 실감하는 성찰인 것이다. (17항 중에서)

에드 헤이스 신부 : 세속의 거룩함

우리는 성찬례의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이 일치의 기초성사에 관한 예식적 기원을 발견한다. 최후의 만찬은 사랑의 행위가 희열과 창조에 넘치는 행위로 변하는 조건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거룩한 만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은 나의 몸입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때문에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때마다 몸과 피, 정신, 그리고 생명의 선물을 바칠때마다, 온 존재를 나눌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 신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부부의 기도는 최후만찬 때에 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같다. “이것은 나의 몸이며 사랑 속에서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의 깨어있음이 성적인 사랑의 행위를 일치의 거룩한 예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초점]

빌과 알마는 아홉자녀를 둔 농촌의 한 부부였다. 알마가 그 지역의 최고 어머니로 뽑혔을때, 마을 사람들은 알마를 축하해주기로 결정하였다. 농민들과 지역사람들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시장이 알마가 그 지역에 공헌한 것을 치하하고 또 본당신부가 그녀의 본당활동을 격려하고 난 후 사람들은 빌에게 한마디 하라고 졸랐다. 친구들을 돌아보고 웃으며 빌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통여자로부터 아주 훌륭한 여자를 만들어내지 않았어요!”

빌의 이런 유머는 그들 부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짐작케 하였다. 그는 일하러 나갈때나 여행을 갔다오면 반드시 알마에게 사랑의 표현을 하곤 했다.

알마는 그들의 결혼 55주년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난 다음날 아침 빌은 울면서 자녀들에게 말했다. “난 정말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드려야 해.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 내내 나는 알마보다 오래살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지. 난 알마가 혼자 외롭게 남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부부는 자신들의 고유한 사랑이야기를 쓰고있다. 어떤 이야기는 지루하고 별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 어떤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아무도 지루한 책은 읽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루한 사랑이야기는 끝내지 않은 채 한쪽으로 치워놓는다. 결혼과 가정생활의 영성은 우리의 사랑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속에서 거룩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영성은 긴 시간의 기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화장실 안의 짧은 기도에 관한 것이다. 더러운 빨래와 난장판이 된 부엌, 적자가계, 화해, 아이들과 실강이를 하고 나이들은 부모들을 모시며 그리고 어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영성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순간들은 결혼식 때나 연애시절만큼 거룩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발씻기는 일에 불리웠음을 깨닫게 해주셨다. 현대의 발씻기는 사람들인 부모들은 애기들의 밑을 닦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상처난 무릎을 싸매주고 서로의 부족과 한계를 받아주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가정교회”인 가족은 그것 자체가 거룩한 공동체이다. 결혼은 때때로 교회의 기초성사라고 불리워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모상대로, 남자와 여자로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창조하셨다.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를 세운다. 아이들이 첫번째로 하게되는 사랑의 경험은 그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관대함은 이 사랑이 가족을 초월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결혼을 매우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부부가 서로에게 강력한 표징이 되고 또 그들의 사랑으로 세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징표가 되라고 초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결혼은 성사로 간주되어야 하며, 교회에 그리고 하느님은총과 거룩함의 세계에 “거룩한 징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성령의 가장 고귀한 선물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느님의 성령의 힘 안에서 우리는 비로서 우리의 이기심, 시기, 분노, 성급함 그리고 원한등을 넘어서 주님이 명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된다.

우리는 결혼이 성소이며 하느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성소는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계획을 기도 속에서 찾는 행위이다. 부부로서 느끼는 의미는 그들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을 선택하셔서 서로에게 속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일치의 종점에 다다르게 하는 사랑에로 부르신 것이다.

일치란 ‘나-중심’보다 ‘우리-중심’적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중심과 자기만족의 욕구를 버리고 상대방에게로 뻗어나감을 의미한다. 사랑은 값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아무런 소유의 끈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부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과 가슴과 영이 하나로 일치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자신은 가장 온전하게 채워지는 것이다. 일치는 권리와 의무의 계약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운 내어줌이라는 계약적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랑의 순환

관계를 이루어가는데 가장 큰 장벽들 중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자신의 감정들과의 씨름이다.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그래서 벽을 쌓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이 어떤 일에 적당치 않다고 느끼거나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여길 때에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자신의 어떤 점들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담긴 포스터를 매일 쳐다보는 거울에 붙여 놓을 필요가 있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셨는데, 그분은 아무 쓸모없는 것을 만드시지 않는다. 내가 먼저 나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사랑의 관계들은 단계를 거친다.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단계는 우리들의 관심이 온통 상대방에만 쏠리고 나머지 세상은 안중에도 없는 때이다. 환멸의 단계에서, 우리는 안정되고 매일 일상을 살며 진부하고 지루해져서 서로를 상투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초점은 각자 자신에게 맞춰진다. “당신은 이제 더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상대방은 나자신의 기대치에 못미치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어버린다.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은 우리자신을 스스로가 인정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벽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환멸의 비참 속에는 혹은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서로간에는 굉장한 거리가 있고 대화가 거의 없으며 분노와 상처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상황에 갇히게 되고 그래서 관계가 무너진다. 이혼이 가장 많은 시기는 이러한 환멸의 단계라고 한다. 가장 많은 수의 이혼이 생기는 때는 결혼 후 첫 3년동안인데, 서로의 요구와 기대가 채워지지않고, 낭만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시기이다. 7년쯤되면 부부가 초보단계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그들의 관계개선을 위한 새로운 목표를 더 이상 꿈꾸지 않게되어 다시 이혼이 상승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빈보금자리의 시기로서,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의 관심을 필요로하지 않고 그래서 부부가 서로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이혼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랑관계의 세번째 단계는 서로에게 더 깨어있게 되는 시기이다. 이때는 용서와 수용, 재결합, 그리고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 단계에 있어 초점은 관계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로 모아진다. 이 단계는 서로 사랑하겠다는 결정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분노나 원한을 가질 수 있다. 알콜 중독의 남편을 가진 어떤 부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같이 나는 그를 사랑하기로 다시 결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번째 단계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고 또 머무를 수도 없다. 오히려 이런 순환은 계속되는 과정일 뿐이다. 환멸의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되면 사랑하겠다는 결정을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낭만과 깨달음은 생명의 단계들이다. 환멸과 비참은 우리가 자신에게 촛점을 맞추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는 죽음의 단계들이다. 사랑은 자신에 죽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다른 이를 위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대부분 우리자신의 행동, 권리 그리고 의무를 관찰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혹은 우리들의 관계에 가장 생명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깨닫는 훈련인 것이다.

배우자들이 상대방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성관계이다. 성은 성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성을 분리시킬 때에 그것은 부담이 된다. 결혼한 지 2년이 된 한 부인이 말한다. ”사람들이 성을 유희로 생각하는 것이 나를 정말 화나게 만들어요. 사람들은 아름다운 황혼을 보고 놀리지는 않지요. 저에게 성적 사랑이라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일은 어떤 황혼보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부부의 성관계는 대부분 그들이 맺고 있는 총체적 관계에 의존한다. 즉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대화 특히 서로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열려있는가에 따라 성관계가 좌우된다는 뜻이다. 성관계는 사랑을 창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있었던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성적 만족은 외로움으로부터 관계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하느님 계획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한 부분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는 수도생활 양식에 기반을 둔 영성을 우위에 두고 결혼생활을 차위에 두어왔다. 부모, 연인, 임신모, 가정부 혹은 기능공의 열성에 대하여 말하는 사랑은 별로 없다. 우리는 반 성적, 반 여성적 신학의 영성에 밀려 총체적인 영성, 특히 성에 관한 영성이 부족하다. 사랑과 친밀함의 생활에 있어 성의 역할을 고려치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성찬례에 참여하기전 성관계를 금지시켜왔던 것이다.

성공적인 결혼에 관한 연구들은 한가지 측정될 수 있는 요인으로서, 부부의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다. 공생활 마지막 주간에 이혼에 관한 말씀을 요청받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됩니다.” (마르 10, 9). 사도들을 포함하여 많은 유태인들이 그러한 영원한 결속이 가능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마르 10,26).

예수님은 일치와 불변함이 어렵고 또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으나, 그것은 우리가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에만 의존할 때다. 어떤 통계숫자는 그러한 일치가 하느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미국의 경우 이혼율이 2:1이지만 1980년 조사는 부부가 같은 종파의 신앙을 갖거나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가며 매일 함께 기도하거나 성서를 읽는 경우 이혼율이 1105:1이었다고 말한다.

[나눔과 성찰]

1. 나는 우리들의 사랑이야기에 어떻게 더 많은 상상과 즐거움과 놀이, 그리고 경이로움을 첨가할 수 있을까?
2. 나는 우리들의 관계에 있어 환멸적인 부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다시 사랑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3. 나는 우리들의 성생활을 어떻게 참사랑과 하느님 체험에 연결시킬 수 있을까?

[행동을 위한 초대와 응답]

◦ 결혼과 가정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풍조 속에서 나는 어떻게 참다운 결혼생활과 가정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친구들과 의논해보자.
◦ 그리스도교적 결혼생활과 부부관계, 자녀관계를 성립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누구의 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출처] <일상생활의 복음화-공동체안의 평신도>,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참사람되어 webmaster@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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