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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특강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기사승인 2019.03.06  18: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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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일) 오후 2시부터 (4시간), 인문카페 엣꿈

예루살렘 입성 - 1302-06년,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야 Bondone, c.1266-1337),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 이탈리아.

최근에 개봉된 영화 <항거-유관순>을 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유관순이 감옥에서 보낸 1년이라는데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 생애의 총결산이 엄혹한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순절,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지, 예수님 그분은 과연 무엇을 갈망하고, 그 갈망을 생애의 마지막에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2017년 이맘때 사순절에 맞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8회에 걸쳐 강의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로 유명한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공동작업한 <마지막 일주일>(다산초당, 2012)과 닉 페이지의 <가장 길었던 한 주>(포이에마, 2011)를 중심으로 성주간이 시작되기 직전에 4시간에 걸쳐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 앞에서 적과 동지가 확연하게 구분되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복음과 하느님 나라 운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은 그 앞에서 어떻게 “황제의 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편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수는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한 대리자였을까요? 그가 진짜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무엇이 서른 초반의 젊은 청년을 십자가로 몰고 간 것일까요? 저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제국에 저항하고 가난한 이를 사랑하려는 예수의 패션(Passion: 열정, 수난)이 그를 죽게 했으며, 차별과 배제를 내세우는 세상의 죄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답합니다. 그분의 열망과 고뇌 안으로 들어가, 어두운 터널 끝에 있는 맑고 밝은 눈빛을 만나게 되시길 바랍니다.

[일정] 성주간 직전 4월 14일(일) 오후 2시~6시까지(4시간)
[장소] 인문카페 엣꿈
[강사] 한상봉 (가톨릭일꾼 편집장)
[수강료] 2만원
[수강신청] 아래 배너 클릭하세요.

 

 ​[오시는 길]

-신촌사거리와 서강대역에서 서강대 방향으로 오시다가, 서강대 정문 지나 동문회관(우리은행) 앞에서 길을 건너면 맞은편에 있어요.
-대흥역에서 서강대 방향으로 오시다가 하이마트(우리은행) 길 건너편에 있습니다.

[참고: 출판사 서평] ​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한 서른셋 청년,
영원히 역사에 남을 운명의 일주일이 펼쳐진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역사적 예수>로 예수의 새로운 측면을 우리에게 알려준 존 도미닉 크로산과 현재 최고의 역사적 진보적 예수 연구가로 인정받고 있는 마커스 보그. 이 둘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연구한 공동 작업물이 <마지막 일주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예수가 죽기 직전 마지막 일주일에 주목한다.

실제로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 성주간이라 부르는 이 일주일은 예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무화과나무의 비유, 성전에서의 논쟁,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신 등 잘 알려진 일화의 대부분을 읽을 수 있다.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정체를 밝히다

저자는 당시 예수가 살던 사회가 로마제국의 폭압이 기승을 부리던 권위적인 지배체제였음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지배층은 로마제국과 결탁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면서도 이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했고 이에 예수는 호화로운 로마 군대의 행렬에 맞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 행위가 정치적 퍼포먼스임을 밝힌다. 말 위에 앉아 성문을 지나는 것은 황제에 대한 풍자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갈릴리에서 온 이 젊은이는 왜 이렇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을 시작한 것일까.

저자는 로마제국의 권력, 그리고 이와 협력하는 유대교 대제사장에 맞서면서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가 말하는 정의로운 하느님의 나라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며 부의 집중이 아니라 공평한 분배였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 우리의 자아에 집중하는 세계라고 조목조목 설명한다.

예수는 떡과 물고기를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며 이웃과 나누는 삶을 공표했고 적은 것을 내놓았지만 가진 것 모두를 헌금한 과부를 통해 부자들을 비판했으며 지배층과 협력하는 율법학자들과 언쟁하면서 관리들의 폭압을 폭로했다. 이 책은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예수를 죽인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열정과 세상의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할은 과연 옳은가

<역사적 예수>로 교리 속에 파묻힌 예수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려낸 크로산은 이번에는 이 책에서 보그와 함께 이 시대에 예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꺼낸다. 그들은 오늘날의 사례로 미국의 제국주의는 예수의 의도와 다른 것이라며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들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꼬집기도 하고 그들이 예수의 구절을 근거로 시민불복종운동을 비판한 것 자체를 비판하기도 한다. 또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와 종교의 역할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천 년간 드러나지 않은 예수에 대한 진실

예수는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유대교의 일부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유대교도 예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예수의 목소리는 한 유대교인의 목소리였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제사장들과 제사를 두고 충돌한 것을 그들의 역할이나 동물제사에 대한 반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저항은 유대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종교를 빙자하여 정당화된 당시의 지배체제, 즉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와 다른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무화과나무 일화에 대한 잘못된 해석

일반적으로 ‘예수의 성전 진노’라고 불리는 일화는 역사적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건으로만 보면 예수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며 기분 내키는 대로 신적인 능력을 남용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당시는 유월절 주간이었으며 우리의 달력으로 3, 4월 즉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는 뜬금없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비난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상징하며 예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상징적으로 파괴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이 구절은 흔히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고 이해되거나 국가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예수가 정치적 책무는 통치자의 영역이라고 했기 때문에 신민은 누구나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게 된 논쟁의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일이 율법적으로 타당한지 물었다. 예수가 타당하다고 하면 군중들의 불신을 받게 되며 그르다고 하면 로마 권력에 대한 저항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될 수 있었다. 이에 예수는 아주 똑똑한 대답을 했다. 이는 “무엇이 황제에게 속하는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유대인들에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식사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들은 “왜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는 매우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이다.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깨트리고 사회적 통합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만찬에서 열두 제자들 모두에게 실제로 음식과 음료를 마시게 한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부활하는 길로 그들을 이끌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이자 초청이다. 우리는 만찬에서 몸을 상징하는 떡,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보다 세상을 위한 떡, 불의를 거부하는 하느님의 정의, 자유에 이르는 새로운 유월절,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그 길에 참여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여행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느 쪽 행진(로마제국의 화려한 행렬, 혹은 예수의 초라한 행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마지막 일주일> 369쪽)

 

 

가톨릭일꾼 webmaster@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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