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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수린이의 질문, "내가 진짜 화가가 될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19.03.06  12: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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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린과 김정은의 <딸그림 엄마글> 여덟번째 이야기]

두어 달 전에 어느 방송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특정 분야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보이는 아이를 찾아 소개하는 프로그램 제작진과 통화를 했습니다. 수린이 그림에 관심이 있다고 수린이 그림을 더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여태껏 수린이가 그린 그림을 정리했습니다. 그림마다 설명을 덧붙이고 사진을 찍어서 제작팀에게 보냈습니다. 수린이가 그린 그림을 한 곳에 모아 보니 양이 꽤 많았습니다. ‘참 열심히도 그렸구나’ 엄마로서 몹시 뿌듯했습니다.

‘TV에 나오면 이제 수린이는 꼬마 화가가 되는 건가?’
‘그럼, 사람들이 나를 훌륭한 엄마라고 하겠지?’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이렇게 잘 키운 거냐고 물어올 테고, 난 “어머!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하면서 미소만 지어야지...’

제 마음은 이미 방송을 찍고서 꿈속을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수린아, 수린이가 TV에 나오면 어떨 거 같아?”
“왜요?”
“우리 수린이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그림 그리는 거 하고 TV에 나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
“전 TV에 나오는 거 싫어요!”

집에 TV가 없어서일까요? 수린이는 그 방송 프로그램을 알 리 없었고, 제 맘과는 확연히 다른 아이의 반응에 전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방송을 보면 아이 마음이 달라질까 싶어서 일단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아서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수린아, 저렇게 나오는 거야. 어때?”
“난 싫은데. 난 그냥 조용히 그리는 게 좋은데. 카메라로 찍으면 그림 못 그릴 것 같은데...”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다시 알려달라는 말로 마무리 했지만, 좋은 기회를 날릴 것만 같아 제 속이 답답했습니다. 당장 방송을 찍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개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 제작 회의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하기 때문에, 실제로 방송을 하기까지 1년에서 2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아리송한 내용의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두 달 쯤 지나자, 저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수린이는 그때 그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내가 진짜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
“엄마, 사람들이 내 그림이 좋대요?”
“그림을 더 잘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 제가 화가가 진짜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인정이 엄마인 저를 한순간에 꿈속을 떠다니게 했고 곧 까맣게 잊어버리게 했지만, 수린이에게는 마음 속 깊이 남아 지금껏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저는 덜커덕 겁이 났습니다. 수린이 의사에 아랑곳없이 촬영을 감행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수린아, 우리 할아버지 말씀 다시 한 번 떠올려 볼까?”

수린이 할아버지는 화가입니다. 60년이 넘게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30년 이상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셨고, 은퇴하신 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답니다. 한 해 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매년 달력을 만드십니다. 새해 아침이면 ‘올해도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려야겠다’라고 늘 같은 말씀을 하신답니다.

“화가가 되려면 매일 그림을 그려야 돼. 십 년 동안 매일 그림을 그리고 한 해도 빠짐없이 전시회를 열었다면, 자신을 화가라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 말씀이 귓가에 들립니다. 수린이와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낡은 이젤을 꺼냈습니다. 수린이는 진짜 화가처럼 이젤에 대고 그림을 그립니다.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려서 전시회도 열 계획입니다. 십 년이 넘게 그렇게 할 거랍니다.

 

유수린 자화상. 그림=유수린(8세)

다시 수린이의 자화상을 꺼냈습니다. 수린이가 여덟 살에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속 수린이 목소리를 들어 봅니다. 무지개 뜬 하늘을 캔버스에 옮겨 그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캔버스 속 무지개를 하늘에 옮겨 그리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수린이는 비를 기다립니다. 비가 오면 무지개가 뜨기를 기다립니다. 비가 그치고 어두웠던 하늘이 다시 말게 갤 무렵이면 수린이는 무지개 찾기 놀이를 합니다. 오래 기다려서 만난 무지개는 아쉽게도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수린이는 무지개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무지개를 그립니다. 수린이 마음에 무지개가 들어옵니다. 수린이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찹니다.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샐리 호킨스 주연의 영화 <내 사랑>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집을 나온 모드 루이스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낯선 집의 낡은 벽을 캔버스 삼아 매일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이 작은 집을 가득 메웁니다. 불편한 몸과 가족의 무관심은 더 이상 모드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모드의 삶에 사랑과 행복이 깃듭니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요리조리 옮겨 놓으며 집안을 장식하는 수린이를 보면 모드와 모드의 작은 집이 생각납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는 영화 속 모드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엄마, 기도해 주세요.”
“무슨 기도를 해 줄까?”
“예술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구나?”
“지금까지 그린 것보다 훨씬 더 잘 그리고 싶어요.”

열 살 수린이는 화가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냥 화가가 아니라 예술혼이 활활 불타오르는 진정한 화가가 되고 싶답니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답니다.

TV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수린이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합니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수린이가 가진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잃어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토록 원하는 화가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 글은 베이비뉴스(ibabynews.com)에 먼저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딸그림' 유수린 엘리사벳: 오직 아름다운 것에만 끌리는 자유영혼의 소유자,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좋은 열 살 어린이입니다.
'엄마글' 김정은 글라라: 수민, 수린 두 아이의 엄마「엄마의 글쓰기」(2017) 저자, 아이들과 보낸 일상을 글로 남기는 걸 좋아합니다.

유수린 김정은 webmaster@catholicworker.kr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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