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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 가톨릭 급진주의자 "가난은 연대와 구원의 표징"

기사승인 2019.03.05  12: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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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이 있다>. 여성홈리스를 다룬 김수목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우연히 한겨레(2019.1.3)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이제 가톨릭일꾼에서 ‘환대의 집’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년 동안 일꾼양성에만 집중했는데, 공부만 하면 뭐하나 일을 해야지, 하면서 ‘여성홈리스’들의 절박한 사정에 마음이 꽂혔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가야한다는 ‘변방의 신학’을 마음에 두고 있는 까닭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환대의 집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서 운영한다. ‘메리하우스’에서는 여성홈리스들에게, ‘성요셉하우스’에서는 남성홈리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제공한다. 대부분 환대의 집은 1층 식당과 2층 사무실, 나머지 공간은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땅값이 비싼 뉴욕인지라 활동가들과 홈리스들은 비좁은 공간을 알뜰하게 사용하고 있다. 메리하우스는 그래도 좀 여유가 있어서 강당과 <가톨릭일꾼>(Catholicworker) 신문 편집실, 그리고 도로시 데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사무실이 보존되어 있다.

여성노숙인이 공중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을 때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16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노숙인이 약 1만1,340명이라 한다. 이중에 여성은 2,929명으로, 전체의 25.8%를 차지한다. 이 조사는 노숙을 하거나 쪽방이나 시설에 수용된 인원을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홈리스들은 노숙이 너무 위험해 몇 푼이라도 돈이 생기면 찜질방, PC방, 만화방에 머물기도 하기 때문에 실제 이들은 조사결과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노숙인 지원단체에서는 이들을 ‘노숙인’이라 부르지 않고 더 넓은 개념인 ‘홈리스’(homeless)라 부른다. 불안정한 주거상태에 머무는 여성들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다. 여성홈리스들은 남성들과 달리 경제적 어려움(46.7%)뿐 아니라 가정폭력 등 가족관계의 어려움(43.3%) 때문에 집을 나온 경우가 많다.

여성홈리스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겹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어느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홈리스들은 성희롱이나 추행, 시선 폭력 등에 노출된다. 위험을 피하려고 밤에는 계속 걸어 다니거나 좀 더 안전한 낮에 자기도 한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거나 대형 서점에서 자는 식이다.” 역 주변에서 잘 때도 자신이 여성임을 감추기 위해 우산으로 가리고 잔다. 생리문제로도 고통 받는다.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경우에는 시설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 시설들조차 남성홈리스 위주여서, 여성홈리스가 1~2개월 정도 머물 수 있는 일시보호시설은 서울에 하나, 대전에 하나 있을 뿐이다.

예전에 노숙인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하던 어느 성공회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언젠가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출산한 여성노숙인을 본 적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갓난아기들은 축복가운데 태어난다는데, 이 산모와 아기를 두고 ‘축하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도대체 이럴 때 하느님은 뭐하시는 분인가 원망했어요. 성모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래도 나중에 돌아갈 집이 있고, 남편도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고 하늘의 군대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미하셨다는데,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난 아기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이 신부님은 여성노숙인과 아기가 겪는 고통을 보며 깊은 영적 통증을 느꼈다. 신앙 안에서 그 여성노숙인과 아기 안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와 더불어 1933년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했던 피터 모린은 “가난한 이들, 추방당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피터 모린은 교회에 환대의 집을 제안하였다. 고대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주교의 가장 큰 책무여서 주교관 옆에는 늘 빈민구제소가 있었다. 모린은 곤궁에 처해 있으면서 구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부자들에게 오히려 ‘순수한 선’을 행할 기회를 준다고 믿었다. 현대사회는 구걸하는 사람을 ‘부랑자’나 ‘거지’라고 부르며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곤궁에 처한 사람을 ‘하느님의 대사(ambassador)’라고 말하곤 하였다.

“설혹 그대들이 부랑자나 거지로 불릴지라도 그대들은 사실 하느님의 대사다. 하느님의 대사로서 그대들은 베풀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로부터 음식, 옷, 안식처를 제공받아야 한다.”

피터 모린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집에 “그리스도의 방”이 마련되어야 하고, 모든 교구는 “하느님의 대사(ambassador)”를 영접할 환대의 집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린과 가톨릭일꾼은 교회가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당장에 여유가 있는 자기네 방을 내어주기 시작했고, 이를 ‘환대의 집’이라 불렀다.

농부 출신의 수도자

아리스티드 피터 모린(Aristide Peter Maurin, 1877-1949)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울테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장 밥티스트 모린과 어머니 마리 파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어머니는 세 아이를 남기고 일찍 사망했고, 새어머니 로잘리 부케는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피터는 스물두 명의 남매 가운데 맏이였다. 가족들은 집안에 있는 동정마리아 상 앞에서 매일 저녁기도를 드리고, 주일에는 2마일이나 떨어진 생 줄리엥 드 투르넬에 있는 교구성당까지 걸어가 미사를 봉헌하였다.

모린은 드 라살(Jean-Baptiste de la Salle)이 창립한 그리스도교육수사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수도회에 입회하여 교수법과 교육심리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파리의 생 조제프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드 라살은 “신앙생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보살핌이 자연스럽게 구체적인 결과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원칙이 피터 모린을 평생 ‘힘차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1895년 9월 피터는 ‘아도라토 샬레’라는 수도명으로 유기서원을 하고, 파리 근교의 기숙학교를 거쳐 노동자 거주지역의 샤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르 시용: 그리스도교 민주주의

피터 모린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98년에 군대에 징집되면서였다. 그는 142 보병연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깊은 혼란에 빠졌다. 피터가 보기에 “군대는 의심스러운 종말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조직”이었다. 피터는 부유층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직된 군대에 농민출신의 수도자가 복무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여겼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수도회에 들어와서도 고민은 그치지 않았다. 이때 피터가 발견한 것이 ‘르 시용’(Le Sillon, 밭고랑, 1901)이라는 가톨릭운동 단체였다. 정부의 학교 종교교육 폐지에 반발해서 만들어진 다른 가톨릭단체들과 달리 ‘르 시용’은 군주제 복귀와 성직계급의 권력화에 찬성하지 않았다. 시용은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프랑스의 미래를 ‘그리스도교 공화국’에서 찾았다.

가톨릭신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통합하려는 이 매력적인 슬로건에 동의한 피터는 결국 시용에 투신하기 위해 1902년 12월, 입회한 지 9년 만에 수도회를 떠났다. 당시 피터는 25세의 젊은이였다. 피터 모린이 계승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행동주의 전통이다. 레오 13세 교황은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을 발표하여, 교회가 노동자를 보호하는데 나서야 한다면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피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레옹 아멜과 마크 상니에였다.

민주주의자인 레옹 아멜은 피터 모린에게 강력한 영감을 주었다. 아멜은 샴파니의 발 데 부아에 있는 가족 소유의 방적공장을 실험적으로 운영하였다. 아멜은 교육보장과 공장운영에 숙련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공장위원회를 만들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연합단체가 세워지고, 고용인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과 건강보장을 의무로 여기게 되었다.

한편 아멜은 고용인이 노동자들의 건강한 육체 이상으로 궁핍한 영혼에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사협력만큼 종교적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 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자선조직을 만들어 공장 인근의 아픈 사람들과 궁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마침내 노동자들과 경영자들이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처럼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경영자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을 운영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이윤을 내기보다 공동체에 봉사하는데 생산물을 사용하는 협동공장의 상징이 되었다. 1908년 피터 모린은 아멜의 공장을 방문해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

‘르 시용’의 창설자인 마크 상니에(Marc Sangier)는 그리스도교의 토대에 위에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일했다. 상니에는 독재사회에서 바라기 어려운 개인의 양심과 책임을 일깨우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믿었다. 시용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소비자협동조합과 생산자협동조합의 설립을 추진했다. 또한 빈민구제소(Hospice)를 세우고, 평화주의를 선포했다. 시용에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어서, 모든 회원들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고, 그 다음에 개인과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상니에와 함께 활동한 폴 르노댕은 “정의는 사랑 다음으로만 군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터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시용의 홍보신문인 <민주적 각성>을 몽파르나스와 라틴지구의 길거리에서 배포하고 밤샘기도에도 참여했다. 당시 피터는 무보수로 시용 활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커피와 코코아를 팔았고, 파리 템플의 뤼 드 상타르쥬에 있는 값싼 방을 얻어 지냈다. 그러나 시용운동이 1907년을 기점으로 가톨릭운동의 성격을 벗어나 민주공화국을 세우자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면서 피터 모린은 시용을 떠난다. 모린에게는 시용운동이 정치적 비전 때문에 영성을 포기한 것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노동은 선물처럼 주어져야 한다

1909년 피터 모린이 프랑스를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군복무를 마치고서도 계속 요구하는 예비군 소집 명령 때문이었다. 그는 군대를 혐오했으며, 경찰을 피해 거주지를 계속 옮겨 다니다 결국 징병제도가 없는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자리 잡았다. 모린은 캐나다 퍼시픽 철도회사에서 수로 파는 일을 하고, 동부 오타와에서 채석장 일을 하였다. 아디론댁스에서는 벌목을 하고, 결국 프랑스어밖에 할 줄 모르는 그는 1911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일을 찾아다니던 모린은 뉴욕을 향해 떠났을 때도 돈 한 푼 없었다. 그는 볼티모어, 워싱턴, 컴버랜드, 매릴랜드를 지나 펜실베니아로 가는 길 내내 구걸을 했다. 펜실베니아에서는 물 한 잔 얻으려고 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가 부랑자로 경찰에 체포당하기도 했다. 1912년 그곳 벤실베니아 서부 석탄회사에서 하루 1달러 50센트를 받고 광부로 일하고, 1913년 오하리오 아크론에서 2달러 받고 건축하청업을 하다가, 시카고에서 페인트 가게와 철도회사 일을 하였다.

피터 모린은 자신의 교육경험을 살려 시카고에서 프랑스어 교습학교를 하게 되면서 8년 동안 약간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48세가 되던 1925년에는 뉴욕에 와서 프랑스어를 가르칠 기회를 얻었다. 모린의 특성은 여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우드스톡의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읽고서, 모린은 모든 노동은 선물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린은 부와 안정을 추구하는 세상은 미친 사회이며, 자신은 가난하게 타인의 선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도 수업을 듣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수업료를 내도록 했다. 제자였던 줄리아 리크래프트는 당시 모린이 흥미로운 방식의 ‘시 쓰기’를 제안했다고 기억한다.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명료한 생각을 짧은 구절에 담아 시를 쓰는 것이다. 훗날 이런 글쓰기는 모린이 <가톨릭일꾼> 신문에 연재한 <쉬운 글>(Easy Essay)로 드러난다.

도로시 데이를 만나다

모린은 우드스톡에서 10마일 떨어진 소도시 킹스톤에 매주 방문해 철길 육교아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이 식당에는 종종 부랑자들이 와서 밥을 먹곤 했는데, 모린은 한쪽 벽에 상자를 걸어놓고 이런 팻말을 붙여 두었다. “주실 돈이 있으면 안에 넣어두시고, 돈이 필요하면 안에서 꺼내 가도 좋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실험은 기복이 있었지만, 25달러가 없어졌다가 몇 주 뒤에 버스비로 사용했다는 쪽지와 함께 상자에 돈을 놓고 가는 이도 있었다.

이 시기에 모린은 이따금 연설에 초대받곤 했다. 한번은 로터리클럽 오찬모임에 연사로 초대받았는데, “대호황 뒤에는 반드시 대공황이 뛰다른다”는 발언으로 i겨난 적도 있었다. 당시 모린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를 당대의 현실에 적용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호소해 왔는데, 다른 성직자들은 물론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조차 참여를 꺼렸다.

교회 안에서 누구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피터 모린은 유니언 광장의 실직자들이나 컬럼버스 서클에 모인 급진주의자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자처럼 연설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거리에서 이야기 나눌 사람을 찾지 못한 날에는 자기 생각을 단정한 글씨로 종이에 적어 복사한 뒤에 그걸 거리 모퉁이에 붙여놓았다.

그 참에 <공동선>(common good) 편집자였던 조지 슈스터가 최근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도로시 데이를 소개해 주었다. 1932년 12월 도로시 데이를 만난 피터 모린은 끝없이 이야기를 거듭했다. 당시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신앙을 갈망하고 있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피터 모린은 도로시 데이가 지역적이고 인격적인 활동보다 중앙집권적인 정치 조직에 아직도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가장 좋은 정부는 자치이며, 가장 좋은 조직은 자기 조직”이라고 말했다. 정부에 호소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과 주변부터 돌보라는 뜻이다. 이후 넉 달 동안 모린은 도로시를 방문해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모두가 지칠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린은 주로 성인들의 삶과 교회전통을 소개했으며, 크로포트킨의 <현장, 공장, 그리고 작업장>(1889) 요약본을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이며 생물학자로, 대결과 경쟁의 효율성을 강조하던 19세기에 협력과 상호부조의 원칙들이 더 효율적인 인간의 성향이라고 말해 왔다. 피터 모린은 <쉬운 에세이>를 쓰면서도 각 편의 제목들을 크로포트킨의 사상에서 모두 가져왔을 정도로 아나키즘에 매료되어 있었다. 

피터 모린은 도로시에게 의식의 명료화를 위한 원탁회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환대의 집, 농촌으로 돌아갈 이들이 훈련을 받는 농경대학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먼저 이런 생각을 홍보할 신문을 만들자고 했다. 모린은 “성인들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로 모인다”면서,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보내줄 것”을 믿자고 했다.

도로시 데이의 집에서 시작된 <가톨릭일꾼> 신문의 발행비용은 처음 몇 사제와 수녀의 도움으로 충당했다. 도로시 데이는 일꾼신문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종교적인 것이 무엇보다 가장 급진적 것임”을 알리고, 레오 13세 교황의 <노동헌장>과 비오 11세 교황의 <40주년>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 재건을 위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전하려고 했다.

이 신문 2호에서 모린은 “(그동안) 가톨릭 학자들은 교회가 지닌 다이너마이트를 솜씨 좋은 언변으로 포장하여 용기 속에 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고 비판하며 “지금 그 뚜껑을 날려버릴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복음이 지닌 혁명적 역동성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이 혁명은 일상에서 시작하고, 폭력적인 자본의 바다 위에 탈((脫)자본의 섬을 만드는 일이다. 비폭력적으로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지금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을 그는 ‘푸른 혁명’(Green Revolution)이라 불렀다.

 

가톨릭 급진주의를 실천하는 가톨릭 일꾼운동

피터 모린은 자크 마리탱(Jacques Martin)을 인용하며 인격주의적 가톨릭 급진주의를 주장했다. 자크 마리탱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만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창조한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한 영혼의 문제이다. ... 영혼의 혁명이 있어야 사회의 혁명도 있다. 급진주의자들이 갖는 어려움은 너무 급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급진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외면의 급진주의는 외형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 내면의 급진주의가 충분히 참된 급진주의다.”

피터 모린은 정치운동이나 사회재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부터 취할 수 있는 ‘내면의 급진주의’를 주장했다. 참된 급진주의자는 인격적 활동이 제도적 형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다. 사사로운 욕심 없이, 먼저 배고픈 이에게 음식과 옷을 주고, 스스로 가난한 사람과 일치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모린은 가톨릭운동이 성직자와 평신도가 조화롭게 일하면서 이루어지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역동적인 교회가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사회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교리와 도덕에 한정된 이야기만 건넨다. 성직자 역시 여기에 만족하려 들면서 가톨릭운동에서 지도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모린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교회를 비판했다.

모린은 내면의 급진주의로 이끄는 가톨릭일꾼의 영성을 성 프란치스코의 자발적 가난, 성 빈센트의 자비, 성 도미니코의 지성적 접근, 성 베네딕토의 손노동에서 찾았다. 이런 정신을 에둘러 ‘전통’이라고 표현하는 하는 피터 모린은 베르댜예프의 철학에 기대어 현세적 욕망에 따라 사는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을 거부했다.

베르댜예프(Nicolai Berdyaev, 1874-1948)는 부르주아들이 더 이상 초자연적 믿음에 구속받지 않으며 ‘전통문화의 신성한 상징’과 단절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기사와 수도자, 철학자와 시인의 자리를 사업과 장사의 이해관계에 매달려 있는 부르주아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모린은 심지어 교회조차 상인들에게 저당 잡혔다고 비판했다.

​​“그리스도는 환금상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고리대금업자를 성전에서 쫓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고리대금업자들이 성전을 저당 잡았기 때문이다.”
(쉬운 에세이)

모린에게 중세사회는 암흑기가 아니라 ‘상식적인 경제의 모델’이었다. 그 시대에는 무역과 상업이 교회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는 결핍과 욕구보다는 필요에 따라 순환되었다. 이런 점에서 중세사회는 탐욕적인 사회가 아니라 길드처럼 ‘기능적인’ 사회였다는 게 모린의 판단이다.

모린은 지난 800년 동안 진행되어 온 종교전통의 쇠퇴와 종말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다. 전통의 종말은 세속화만이 아니라, 영혼을 안내하고 보호하는 영원의 덮개를 열어 영혼을 경제, 군사, 정치 체제 속으로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모린은 전통의 회복을 통해 사람들을 압제에서 구하고자 했다. 전통은 그에게 ‘오래된 미래’였던 셈이다.

땅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라

이런 전통을 피터 모린은 “그리스도로 돌아감, 즉 땅으로 돌아감!”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가톨릭일꾼> 1935년 11월호에 실린 이 글은 경배(敬拜), 경문(敬文), 경작(耕作), 곧 기도하고 공부하고 노동하라고 주장한다. 모린은 산업화와 기계노동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으며, 농경사회와 손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밀려난 실업자들에게 농업노동은 그 사람들을 더 인간답게 만들고 창조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모린이 기획했던 이스튼의 농경공동체는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농경공동체는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에게 집과 존엄성을 제공할 뿐 아니라, 기업적인 방식의 농업에 반대하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전달했으며,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골에 있는 환대의 집’이라 볼 수 있는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가톨릭일꾼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특히 ‘농경공동체’에 들어온 농부들과 학자들 사이에도 갈등이 빚어졌다.

농장에서는 과일을 재배해야 하는지 아니면 양배추와 감자, 토마토만을 계속 재배해야 하는지 토론이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과일 재배를 ‘부자들의 나태’에 기여하는 불필요한 사치라고 생각했다. 다른 날은 농장에서 기른 작물을 식품으로 팔아야 할지, 필요한 사람에게 거저 주어야 할지 논란이 일었다. 한편 농장에선 ‘기른 것을 먹고 먹는 것을 기른다’는 원칙 때문에 커피, 담배, 오렌지를 볼 수 없었다. 계란 하나를 덜 먹고 더 먹는 문제로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학자들은 일하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해서 농부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모린은 악화된 농장 상황에 화가 나서 이런 글을 써서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가톨릭일꾼 농경공동체는
가톨릭일꾼들이 공동체로 사는 농장이다.
농경공동체에서 일하는 것은
사람들이 먹기 위한 음식을 생산하면서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병약한 사람들은 일할 수 없지만 먹어야 한다.
가톨릭일꾼은 아이들과 병약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몫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신사 농부들과 숙녀 농부들은
일꾼이 아니라 게으름뱅이들이다.
시간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사람을 돕는 것으로 하느님을 돕는데 사용해야 한다.
신사 농부들은 자신들의 이마에 땀을 흘리고 살지 않는다.
신사 농부들은 신사도 농부도 아니며
숙녀 농부들은 농경공동체에서 가장 쓸모가 없다.”

전쟁, 그리고 마음의 무장해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가톨릭일꾼에서 새로운 논란이 발생했다. 1940년 8월 도로시 데이는 전국 각지에 있는 가톨릭일꾼 회원들에게 징병과 전쟁에 양심적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편지를 회람했다. 모린 역시 입장이 단호했다. 모린은 근본적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되더라도 이웃을 해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린은 1938년 4월에 발행한 <가톨릭일꾼> 신문에서 모든 물리적 무장해제뿐 아니라 마음의 무장해제를 요청했다.

모린은 ‘정당한 전쟁론’을 거부하고, 악에 대항하는 것이라 해도 모든 폭력적인 수단을 거부하라는 게 그리스도의 요청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전쟁에 열광적인 국민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모린은 도로시에게 당분간 전쟁 반대를 외치기보다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조언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대인을 보호하자’는 글을 <가톨릭일꾼>(1939.7-8)에 실었다. 모린은 미국 정부가 유럽에서 탈출하려는 유대인 망명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터 모린,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다

피터 모린은 1944년 이후 급속하게 건강이 나빠졌다. 뇌일혈 증세도 보이고 심장성 천식이 돋기도 했다. 급기야 1949년 5월 15일 일요일에 뉴버그 농장 뒤채에 있는 그의 방에서 이승을 떠났다. 뉴버그의 지도사제인 존 파레이 신부가 임종하는 이를 위해 기도를 올렸으며, 모린은 몸부림이나 고통 없이 금방 숨을 거두었다.

고인은 평소 입던 옷을 입고, 수의는 가난한 이를 위해 기증되었다. 뉴욕 환대의 집에 빈소를 마련하고 장례미사는 거룩한 변모 교회에서 열리고, 시신은 퀸스의 성 요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장의사가 “볼품 없다”고 인공잔디를 사서 무덤을 덮으라고 제안했지만, 도로시 데이는 흙이 모린을 덮고 있는 모습이 좋았기 때문에 거절했다. “모린은 우리 모두 그런 것처럼 흙에서 왔으며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피터 모린에 대해 <타임>은 이런 사망기사를 썼다.

“모린의 목표는 현대사회를 ‘사람들이 선해지기 더 쉬운’ 사회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타협이 없었다.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고리대금의 원천을 만들고 기계로 사람을 비인간화시켜, 비인격적인 사회주의와 똑같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모린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 개인 소유물을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것만 보유하는 농경공동체의 경작지에서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린의 이런 정치적 경제적 입장은 늘 논란을 불러왔지만, 그가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복음적 급진주의를 살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타임>은 이렇게 장례식을 묘사했다.

“버려야 될 정도의 낡은 옷이 입혀지고 기증받은 무덤에 안치된 한 가난한 남자의 시신이 지난 주에 매장되었다. 그에게 걸맞게 준비된 일이었다. 대부분의 생애동안 피터 모린은 자기 소유가 아닌 침대에서 자고, 누가 가져가지도 않을 옷을 입고 지냈다. 그러나 사람들과 손수레로 가득 찬 맨하튼 거리 아래의 빈민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스펠만 추기경(뉴욕교구장)은 자신의 대리자를 보냈다. 가톨릭수도회들을 대표하는 많은 사제들이 참석했고, 평신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 시카고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장례식 전날, 그들은 밤새도록 시신이 누워있는 누추한 방으로 가서 기도를 드리고 묵주알을 굴렸다. 왜냐하면 그들 중 많은 사란들이 피터 모린을 성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터 모린에게 받은 가장 또렷한 영감을 표현한 이는 마크 H. 엘리스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모린이 가장 철저한 반전을 보여준 것은 가난이다. 가난은 세상에게는 수치심의 표징이지만 그에게는 연대와 구원의 표징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만큼 피터 모린을 잘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1936년 6월 피터 모린의 글이 <쉬운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을 때, 도로시 데이는 “그의 에세이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쓴 글이 아니었다. 그 글은 우드스톡의 헛간 아래 랜턴 불빛 속에서, 크렘퍼 산 위에 소년캠프 안에서, 보워리가 커피숍에서, 유니온 광장의 벤취에서 쓴 글이었다. 모린은 시위 중에 피켓 라인에 서서도 쉬지 않고 공책에 글을 적었다. 종종 교회에서 묵상 중에도 한 두 줄 펜으로 쓰곤 했다.”고 기억한다. 도로시가 볼 때 피터 모린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모린의 여행가방 안에는 틀림없이 책만 가득 들어있을 것이고, 여벌옷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주었을 것이고,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있으면 가난한 이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일꾼운동 초기부터 모린에게 방을 하나 내주었으나, 그는 결코 그 방을 자기 방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곳에는 방이 필요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고,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경우에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비판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결코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도로시가 볼 때 모린의 적은 지배와 권력이지 살과 피는 아니었다.”(마크 H. 엘리스) 

[참조] <피터 모린-20세기에 살다 간 예언자>, 마크 H. 엘리스, 하양인, 2015
[출처] <가톨릭평론> 2019년 3-4월호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한상봉 webmaster@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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