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마리아, 고요히 머물러 영혼의 깊은 계단을 내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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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마리아, 고요히 머물러 영혼의 깊은 계단을 내려간
  • 한상봉
  • 승인 2019.03.0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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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18
by Johannes Vermeer.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천지간에 엄마 없는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게도 살풋한 사랑 넘겨주던 어미가 있었고, 방패처럼 든든한 아비가 있었건만 세월이 하수상하여 일찍이 울타리를 잃고 제가 대신에 집안에서 엄마노릇을 해야 했었지요. 저는 이미 혼기를 놓쳐 버렸고, 제 동생 마리아는 어느덧 처녀가 다 되어 이젠 집안 일을 제법 도울 수 있게 되어서 한시름 놓던 차였습니다.

마리아는 묘한 눈매를 가진 아이였어요. 물동이를 이고 골목으로 돌아서면, 마리아는 창틀에 손을 얹고 저를 물끄럼이 바라보곤 하였는데, 제가 집안에서 청소를 하느라 분주할 때에도 그 아이는 제 몸놀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 집요함이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을 지경이었지요. 그 아이는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아이가 제게서 그 시선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고, 저도 제게서 떠나간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일어나면 마리아도 따라 일어나 떠오르는 해를 향해 앉아서 기도를 하고, 물동이를 들고 집을 나서면 마리아도 걸레를 집어 들었지요. 제가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서 일터로 나가면, 마리아는 그제야 방에 들어앉아 빈둥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래요, 저는 마리아가 일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가끔 저자거리에 나가서 돌아다니다 해질 무렵에 돌아오곤 했는데, 내가 물으면, 그냥, 이라고만 짧게 답했습니다. 그러면 또 그 일을 잊고 지내곤 했지요. 저는 신경을 써야 할 곳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하루분의 근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잠든 날에도 다음날 아침이면 또 다른 새로운 걱정꺼리가 생겨나더군요.

일이란 제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지요. 밥을 짓는 것부터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 것까지 제겐 모두가 ‘일’이었습니다. 처분해야 할 일과 처리해야 할 일, 저는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부릴 생각이 없었어요. 저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책임감 있게 집안을 꾸려야 했고, 종교적 의무도 게을리 하고 싶지 않았죠.

사람들은 저를 가리키면서, 아이들에게 “마르타 반만이라도 닮아봐라!”하고 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 때문이 아니라 저는 워낙 천성이 부지런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야 불안하지 않고 잠자리에서 편안한 한숨을 포옥 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변을 한 번 휘둘러보고 마음속으로 ‘그래,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무리 되었군’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제 일을 돕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게는 늘 처리해야 할 일이 눈에 뜨였지요. 이것도 병인가 싶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예수란 분이 저희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본래 목수였다고도 하고, 어부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아마 제자들 가운데 눈에 익은 어부들이 더러 끼어 있었던 탓일 것입니다. 출신이야 그저 그렇다 해도 타고나기가 또릿또릿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그 말씀에 탄복하여 따르는 무리가 꽤 늘어난 모양인데, 저희 마을 사람들도 그분을 뵈려고 난리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놀라운 역사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는데 무엇을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눈빛에 믿음이 가고, 손끝이 부드러운 그분을 곁에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분께 청하여 제 집에 모시게 되었는데, 정작 그분을 누추한 제 집에 들이고 나니 뭔가 대접해 드려야 하겠고, 자리라도 털어드려야 되겠고, 왠지 물 컵마저도 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제가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에, 제 동생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고요히 듣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내 뒤를 응시하던 그 시선이 오늘은 그분에게로 붙박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얼마 전까지 저를 돕던 그 손길을 오늘은 무릎에 포개어 얹고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도 동생처럼 모처럼 찾아오신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싶었지만, 그분은 손님인지라 뭔가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 앉지 못하였는데, 마리아가 언니 입장을 좀 생각해 주었으면 싶었습니다.

슬그머니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해 보았으나, 곁에 계셨던 예수님이 딱 잘라서 말씀하시더군요. “마르타, 이제 그만 그대도 여기 와서 앉으시오. 그대는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같소. 정작 중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라오. 난 대접 받으러 이 집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나눌 것이 있다면 내가 그대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고, 이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할 것이오.”

마리아는 이미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물을 찾아낸 느낌이었습니다. 그분 발치에서 마리아가 영혼의 깊은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동안에 저는 우물 언저리에서 그저 바쁘게 맴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저는 마리아에게서 생명을 주는 우물물을 길어다 마셨고, 내 영혼에서도 우물을 파기 시작하였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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