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제국주의, 예수의 비폭력 평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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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제국주의, 예수의 비폭력 평화주의
  • 한상봉
  • 승인 2019.03.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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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48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Christ's Entry into Jerusalem, 1842_Hippolyte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죽음과 부활까지 다룬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지은 <마지막 일주일>(다산초당, 2012)에 담겨 있는 내용은 이 즈음 살펴볼 만 하다. 서기 30년 어느 봄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두 행렬이 있었다. 이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지주일로 기념하는 유월절 첫날이었다.

첫 번째 행렬은 예루살렘 동쪽에서 당나귀를 타고 추종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올리브 산을 내려오고 있는 예수의 일행이었다. 예수는 나자렛 출신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줄곧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 왔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남쪽으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해 왔다. 맞은 편 서쪽에서는 이두메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60마일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 해변을 출발해 제국의 기병대와 보병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이 광경을 두고 “예수의 행렬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으며, 빌라도의 행렬은 제국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유대교의 중요한 절기들에는 수많은 대중들이 순례하기 때문에, 로마 총독은 그 기간에 예루살렘에 머무는 게 관행이었다. 빌라도가 이끌고 온 군대의 임무는 유대교 성전과 성전 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에 상주하는 주둔군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제국의 군대가 입성하는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었다.

“말을 탄 기병들, 보병들, 가죽 갑옷, 투구들, 병기들, 깃발들, 깃대 위에 앉은 황금독수리들, 금속에 반사되어 빛나는 태양, 그 소리는 또 어떤가? 행군하는 군화소리, 가죽이 스치면서 삐걱거리는 소리, 말고삐가 쩔렁거리는 소리, 진군이 북소리. 먼지의 소용돌이. 말없이 응시하는 눈들, 호기심을 가지고 보는 눈들,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눈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들.”

로마의 ‘제국주의 신학’에서 황제는 단순히 로마의 지배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이런 신학은 기원전 31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로마를 다스렸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 아티아에게서 그를 낳게 한 아폴로 신이었다.

전해지는 비문에 따르면, 그는 지상에 평화를 가져다 준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이며 ‘구원자’였다. 죽은 뒤에도 하늘로 올라가 신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전해진다. 예수가 활동했던 14년부터 37년까지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위압적인 행렬은 ‘힘에 의한 평화’를 과시하는 제국의 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황제의 탄생뿐 아니라 황제 자신이 ‘복음’이라고 선포했다.

그런데 예수의 행렬은 어떠한가? 예수는 마치 미리 계획된 정치적 퍼포먼스처럼 ‘한 번도 멍에를 매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추종자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교감하며 그들이 벗어놓은 겉옷을 밟고 지나간다. 예수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즈카르야, 9,9-10)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두고 직접 즈카르야 예언서를 인용해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고 전한다.

예수의 행렬이 선포하는 평화의 임금은 더 이상 전차와 말이 필요 없도록 전쟁을 추방하고 평화를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행렬 맞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빌라도의 행렬은 제국의 권력과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도로시 데이와 토마스 머튼, 요한 23세 교황이 이미 전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포했듯이, 무력에 의한 평화를 반대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며, 십자가에 사람을 못박는 폭력이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비폭력을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 이것은 폭력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자비로 대함으로써 폭력의 ‘극악함’을 폭로하고, 그 적개심을 증발시켜 버리려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리스도인은 빌라도의 ‘황제’인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의 ‘아빠’인 하느님을 믿는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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