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라는 말은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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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는 말은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
  • 이기우 신부
  • 승인 2019.03.0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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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8주일; 2019.3.3] 집회 27,4-7; 1코린 15,54-58; 루카 6,39-45 말과 말 살이의 복음화

[이기우 신부 강론]

‘독립’이라는 말과 ‘빨갱이’라는 말, 그 역사와 인식론

1. 올해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나자렛 선언에 이어서 군중과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 왔습니다. 루카가 전해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삶에서 얻는 깨달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 그 깨달음이 위선인지 겸손인지는 행실을 보면 알 수 있거니와 말만 들어보아도 생각을 알 수 있으므로 하느님 나라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마음으로 올바른 말과 행실을 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이즈음은 지나간 백년을 돌아보며 다가올 백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 전환기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다가오는 새 시대를 준비하려면 정의로운 생각에서 나오는 진실된 말과 화합에 적합한 행실과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사진

2. 백 년 전,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 좋은 거짓말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등한 것처럼 꾸며댔지만, 실상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조선의 백성은 일본인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백 년 전 조선의 이천만 백성이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용감한 이백만 만세꾼이 거리로 나와서 손수 만든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3월 1일부터 두 달 동안 서울은 물론이요, 남북한 전 지역과 제주에서, 그리고 북간도와 연해주, 미국의 하와이와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살던 해외동포들까지 온 민족이 한마음으로 대한독립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총칼은 물론 돌맹이조차 없이 오로지 입과 손으로만 만세를 외쳤던 조선의 백성을 일제는 무자비하게 살육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조선인의 폭력으로 사망한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시 외쳤던 ‘독립’이라는 말은 평화의 말이었던 겁니다.

3. 3·1 독립선언의 함성을 가슴에 간직한 조선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주체이며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 첫 열매가 민주공화국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정의로움의 가치가 민권의식으로, 이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이 생각이 다시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로 나타난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헌장 제1조에 3·1 독립선언의 뜻을 담아 ‘민주공화제’를 새겼습니다. 백 년 전 독립만세를 외치던 그 무렵이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국상 중이었지만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멸망시켰지만 나라가 다시금 왕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랬던 사람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생각이 진실된 말을 거쳐서 정의로운 행동으로 나타나고 이어서 백성이 주인인 새 나라의 실천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4.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백주년 경축사에서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너무나 오래 미루어두었던 친일잔재 청산의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경축사에 따르면,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아직 북녘 땅에 공산 정권이 세워지기도 전인 그 당시에, 진짜 공산주의 사상을 간직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만 적용된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립운동가를 낙인찍는 말이었다고 하지요.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습니다.

5. 일제의 식민통치는 총체적인 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일제 잔재를 청산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이게도 이 ‘빨갱이’라는 말은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비극의 한가운데 리승만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풍찬노숙을 하며 고생스럽게 독립운동을 하던 대다수의 독립투사들과 달리, 해외동포들이 후원해 준 돈으로 미국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외교적인 독립운동에만 매달리던 그는 지나친 권력욕과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한 비리 때문에 임시정부에서 탄핵되기까지 했던 기피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맥아더 장군과 미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귀국해서는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던 국내에서 자신의 심복으로 삼을 친일세력을 복권시키고는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던 건국준비위원회에 모인 백성을 ‘빨갱이’로 몰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일제로부터 독립했다는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일제의 악행을 흉내낸 이 행실이 동족을 적으로 삼는 70년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6.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등 민족 분열을 막고 통일된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던 정치 지도자들을 비열하게 암살해 버린 리승만이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단독선거를 시도하자 그 당시 가장 민권의식이 앞서 있었던 제주에서 먼저 저항이 일어났고, 리승만과 미군정 당국은 친일파 군경을 시켜서 이들을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제주도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이들은 제주도민들을 토벌하겠다고 여수와 순천의 군인들을 동원하려고 했고, 동포를 보호해야 할 군인이 동포를 토벌할 수는 없다며 저항한 군인들은 물론 여수 순천의 무고한 시민들까지도 리승만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빨갱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악인으로 낙인찍는 악마적인 주술처럼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7. 그 후 쿠데타로 집권한 친일파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서는 이념이라고 볼 수도 없는 반공을 국시로삼기도 했고, 광주민중항쟁으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 시절에서도 친일 청산은커녕 친일을 가장한 반공 노선 위에서 정치적 경쟁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라는 말이 전가의 보도처럼 남용되고, 용공세력이니 좌경세력이니 하는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려 왔습니다.

이 독재자들은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동베를린 사건, 구미유학생 사건, 재일유학생 사건, 울릉도 사건 등으로 수많은 조작간첩을 만들어서는 많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빨갱이’로 낙인찍어 희생시켰고, 그 가족과 유족들은 연좌제로 묶여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친일파들이 득세해온 지난 70년 간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남한 사회는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반공종교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냉전구도를 혁파하고 바야흐로 갈라졌던 남북한이 화해하려는 이 시점에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재를 뿌리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로 삼는 것이, ‘빨갱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북한증오론입니다. 친일의 언어로 독재의 방패를 삼아서 반공이라는 허울 뒤로 숨어서 행한 이 모든 악행이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입니다.

8. 오늘 제1독서인 집회서의 말씀에, 사람은 말로 평가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빨갱이’라는 혐오와 증오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은 정의롭지도 않고 국민화합과 민족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말로 시작하여 화합의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빨갱이’라는 말이 없어져야 합니다.

9. 지난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식민지와 전쟁, 가난과 독재를 극복하고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4·19혁명과 부마민중항쟁,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화된 나라를 만들어냈습니다. 백 년 전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를 꿈꾸었던 독립선언이 비로소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실체로 실현되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 반쪽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군사적 긴장과 이념적 대림으로 얼어붙었던 이 땅 한반도에 작년부터 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갈라졌던 겨레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여정에 용기있게 나서야 합니다. 이 도전은 새로운 시대의 기운입니다. 거짓된 말과 그 안에 담긴 불의한 증오를 몰아내어서 서로가 화합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갈라진 민족까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룩한 통일 코리아가 세워질 때까지 이 도전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백 년 전 독립선언이 완성될 수 있고 독립이라는 말이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힘으로 결정하고 개척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독립, 진정한 해방이 찾아올 것입니다.

10. 우리는 숨막히는 신분차별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신앙의 진리를 자발적으로 들여왔고, 혹독한 조선왕조의 박해를 이겨내고 그 진리를 증거했던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삼일 독립선언 백주년을 맞아 한국 천주교회가 민족 앞에 민족의 아픔을 저버렸던 친일행각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하며 참회해야 하는 뜻은 새 역사로의 도전 대열에 힘차게 합류하기 위해서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에 눈뜬 선각자로서 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겨레 앞에 생각과 말과 행실로 증거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새 시대로의 도전은 이백 년만에 찾아온 민족 복음화의 기회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도록, 십자가 수난을 각오하는 다짐으로 부활의 승리를 희망합시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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