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세례가 교회를 싸구려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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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세례가 교회를 싸구려로 만든다
  • 이기우 신부
  • 승인 2019.01.13 2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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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2019.1.13] 이사 42,1-4.6-7; 사도 10,34-38; 루카 3,15-16.21-22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1. 오늘 교회가 지내는 주님 세례 축일은 성탄 시기를 마치고 연중 시기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주님께서 세상에 완전히 공현되시고, 이제부터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세상 곳곳을 다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세례 사건에 대해서 제1독서는 그 역사적 의미를 일찌감치 내다보았고, 제2독서는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가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서 세세대대로 계승되리라는 미래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합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존재로 세상에 공현되는 사람들 덕분에 공정한 세상을 위한 노력은 중단 없이 지속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력은 부러진 갈대나 꺼져 가는 심지처럼 가치 없어 보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드높이는 방식으로 요란한 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조용한 혁명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민족들을 어둠 속에서 해방시키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사건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로 하여금 세례로 그치지 아니하고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살게 하는 도덕적 명령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스라엘에 파국이 임박했으며 따라서 회개해야 한다는 인식에 동의하셨지만, 당신께서는 요한처럼 세례를 주러 다니시지는 않았습니다. 유다 땅에서 얼마 동안 세례를 베푸신 일 이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으셨고, 요한이 감옥에 갇힌 다음에는 세례를 주러 다니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셨습니다. 세례가 악에 대한 고발이요 악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는 일이라면, 복음선포는 선을 선포하는 일이요 다른 이들이 저지른 죄의 상처까지를 받아 안겠다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고발도 선포도 필요하지만 선포가 고발에 앞섭니다.

 

Bautismo de Jesús by Nerina Canzi

3. 오늘날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성사는 과연 어떠한 의미로 여겨지고 있을까요? 세례 후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통계상 신자 수가 무려 80%라는 사실은 대다수 가톨릭 영세자들에게 세례란 그저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음을 웅변합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어떠한 내용으로 교리를 공부하고 배웠든지 상관없이 영세를 하려고 하는 예비자들에게는 매우 뚜렷한 도덕적 메시지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다가 죽어서 좋은 데로 가야지!’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도 비록 신앙이 없다 해도 이런 수준의 양심은 이미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고 학교에서 기본적인 시민교육을 그러저럭 받은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도덕성은 갖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착하게 살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굳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의 양심으로 착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은연 중에 내보이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저런 이유가 생겨서 주일미사에 빠진다 해도 그다지 걱정할 일이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세상을 살아갈 자신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더 매력 있어 보이는 다른 교파의 종교생활로 이끌리거나 심지어 다른 종파의 종교생활로 개종한다 쳐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착하게 살려고 마음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착하게 살려는 마음을 철학에서는 개인주의라고 부릅니다. 냉정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착하게 산다는 태도는 ‘남들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묵시적 가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남들이 상처를 주거나 손해를 입히거나 배신을 하거나 한다면 그때부터는 착할 수가 없습니다. 착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앙갚음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대개는 법정다툼으로 가고, 그냥 참으면 참는 대로 암에 걸리고 말아서 또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고, 또 사회의 법률 역시 이러한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전제로 제정되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5. 하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회개를 의미하는 물의 세례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불의 세례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성령의 세례라고도 부릅니다. 성령의 세례는 사랑의 십자가로 그치지 않고 사랑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불의 세례이기도 한 예수님의 세례는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세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세례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는 선언을 합니다. 그래서 세례식 중에는 반드시 부활초를 켜 놓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살기는 쉽습니다. 되돌아올 이익을 기대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되돌아오리라는 기대 없이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받았다는 부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나는 정도의 결심이 세례 사건에 앞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네 교회 현실에는 이런 진지함이나 신중함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깨우침도 없고 뉘우침도 없이 받는 세례가 그 당사자에게 그 얼마나 도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매 주일 참례하는 미사도 버거울 정도라는 것이 통계로 나타나는 현실 아닌가요? 당사자에게 통과 의례요, 본당에서는 연중 행사로 치루어지기 마련인 세례는 형식상으로는 전혀 하자 없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엄밀히 말하면 냉담자를 양산할 뿐인 조직 확대 행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그 어느 조직도 가톨릭교회처럼 허술하게 새로운 조직 참여자를 관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냉담하는 수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격적 결단이 결여되어 있고, 사회적 인식이 요구되지도 않는 그런 통과 의례이자 연중 행사용 세례식은 냉담자 양산 효과만 가져온다는 점에서 전례적 낭비에 가깝습니다.

6. 예수님의 세례 사건 때에는 하늘이 열렸습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하는 세례식에서도 사실은 같은 영적 효과가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가 진지하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주 공간의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세상을 새로이 바꿀 정도의, 인격적 결단이 내려진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는 세상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겠다는 인격적 결단을 내포하는 말이 ‘하늘이 열렸다’는 영적 효과의 내용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뜻에 따르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르든지 결국 사람은 세상이나 하느님 중에서 선택한 뜻대로 취사선택을 해서 알아들은 자기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자신의 뜻을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도록 내어맡기겠다는 인격적 결단을 뒷받침해 주는 말이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자기자신의 뜻을 정할 때 성령의 이끄심을 심사숙고해서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격적 결단은 사회적 인식과 뗄 수 없는 선택이 됩니다. 내가 지금 내리는 인격적 결단이 내가 어떠한 세상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그것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새로운 역사였습니다. 적어도 가진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는 공정한 세상이었습니다.

7. 값싼 세례가 어떻게 교회를 싸구려로 만드는지 우리는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열이 식어버린 현대 유럽과 남미 교회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냉담자를 양산할 뿐인 값싼 세례를 이제는 졸업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 결단을 존중하고 분명한 사회적 인식이 뒤따르는 귀한 세례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도 귀해집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사울이 하느님의 눈에 벗어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내려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행동하지 않고 병력에 더 기대려고 병거 조사를 하고 전투 후 얻은 노획품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울 왕보다 더 나으려면 통계로 교세를 가늠하는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통계상 교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교세대로라면 고대 로마나 중세 유럽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바뀌어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대 로마는 100%가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도덕적 타락을 막지 못했고, 중세 유럽 역시 100% 가톨릭 신자였지만 마르틴 루터의 항의를 받을 정도로 타락했고 칼 마르크스가 민중의 아편이라고 조롱을 할 정도로 가난한 이들을 무시한 결과 공산주의 혁명을 자초했습니다. 오늘날 대규모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안에서 태동했습니다.

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단 한 사람, 당신의 마음에 드는 아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승부수를 던지셨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시려는 모험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입니다.

이기우 신부
영원한도움의성모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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