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성자,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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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 한상봉
  • 승인 2018.12.1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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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 양희송, 북인더갭, 2018

성문 밖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참 불편한 믿음이다. 그게 두려워서 교회 밖으로 나가는 못하는 신앙은 그래서, 더욱 가련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변방으로 나아가라”고 거듭 요청하지만, 우리는 한사코 교회 안에 안전한 대피소를 마련해 놓고 기도하면서 부둥켜안고 있다. 이들에게 ‘정치’는 금칙어에 해당한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정치적 논란거리가 되는 발언을 자제하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모양이다. 신앙은 같아도 정치적 견해는 다르니, 교회를 분열시키는 ‘정치’는 신앙생활의 목록에서 제외시키자는 것이다.

정치는 위험한 ‘거인’이다. 그 거인을 잘못 건드리면 예수님처럼 비참하게 살해당할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 머물며 우리들만 알아듣는 언어로 대화하며, ‘우리들만의 천국’을 갈망한다. 교우들이 입에 붙은 빨랑카, 꾸르실료, 레지오, 파스카, 아멘은 그들만의 특권적 언어처럼 자랑스럽다. 이교도와 구분되는 우리만의 특별함이 이 언어 속에 담겨 있다고 여긴다.

양희송이 지은 <세속성자>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소개하며, 교회 안팎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는 관행을 문제 삼는다. ‘진격의 거인’은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이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교회 안에 갇혀 있는 그리스도인을 안타깝게 여긴 탓이다. ‘진격의 거인’은 식인거인들의 공격을 피해 인류가 월 마리아, 월 로제, 월 시나로 불리는 3중의 방벽을 쌓고 살아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거인들이 공격해 올 때마다 방벽의 더 깊은 곳으로 도망하가는 대신에 성벽 바깥에 살 길이 있지 않을까 탐색하는 주인공 에렌의 이야기다. 양희송은 여기서 성벽 안쪽은 신앙이고, 성벽 바깥은 불신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거꾸로 성벽-교회 안에 있는 불신과 맹신을 드러내고, 성벽-교회 바깥에서 성심으로 믿는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신앙인을 ‘세속성자’(a secular saint)라고 부른다.

왜 세속성자인가?

<세속성자->, 양희송, 북인더갭, 2018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앙인들을 주로 ‘교우’나 ‘신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바오로 서간에서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펴낸 성경에서도 줄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saints)’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성도’라는 표현이 개신교 용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별히 성인공경이 유행하는 가톨릭에서 ‘성도’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이 때문에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이 대체로 미적지근한 지도 모르겠다. ‘복음적 열정’이나 ‘거룩한 갈망’은 일부 수도자와 성직자에게만 저당 잡혀 놓은 모양새다. 다른 신자들은 그저 전례와 성사생활 잘 하고, 틈틈이 선행하고, ‘거룩한’ 사제들의 그림자만 잘 따라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상에서 하느님을 찾아 나선 거룩한 무리다. 그래서 양희송이 말하는 ‘세속성자’라는 표현은 평신도들에게 각별하다. 이는 곧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A Christian in the world)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양희송은 ‘성도’라는 집단에 앞서 ‘성자’라는 개인의 신앙에 주목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에는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인’(canonized saints)이 따로 있다. 이들은 탁월한 신앙적 모범을 보인 이들로, 대체로 순교를 당한 경우가 많고, 이승을 사는 신자들이 이들의 공덕에 힘입어 전구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에서는 성인을 공경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우상숭배로 여겨 비판하기도 했다.

성공회나 루터파, 감리교 등 개신교 일부에서는 ‘성인’을 인정하지만, 예배나 기도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인이 되라고, 거룩해지라고 요청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주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가? 구약의 가장 전형적인 방식은 ‘정결’을 지키는 것이다. 부정한 것, 불결한 것, 부패한 것의 목록을 만들고, 이것을 내 삶에서 끊임없이 없애 나가면 거룩하고 순결하고 온전해진다고 믿었다. 그 해법이 율법 제정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규칙을 정하고, 규칙을 위반했을 때는 보상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그래서 나온 게 제사이다. 이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들과 율법을 다루는 율법학자들의 권위가 높았다. 이들은 특별대우를 받으며 백성 위에 군림하기 쉽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내내 사제들과 거짓 예언자들을 성토하고 나섰다. 이사야는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데 있다고 선포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6-9)

 

basil-fool-for-christ

세상에 ‘어리석은’ 성자들의 행진

본회퍼는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는 세속을 등지고 성스러움을 추구한 것이었으나, 거기에도 세속이 있음을 보았다. 루터는 수도원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옴으로써 온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신앙생활이 종교적 공간 내부가 아니라 세속과 일상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거룩함 역시 그 안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데 수도원과 세상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진공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성자들 역시 살균 처리된 청정한 실험실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성자들은 그래서, 때로 부질없는 조롱거리로 비춰질 수 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라는 말은 삶의 무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세상을 타협의 대상으로 보려는 비겁한 신앙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목사도 돈을 찾고, 신부도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이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foolishness)가 되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1코린 4,10-13)

동방정교회 전통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fool for Christ)가 되기로 작정한 성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시리아에 사로잡혀 갈 것을 내다보면서, 3년 동안 맨발에 벗은 몸으로 예언을 했던 이사야 예언자도 ‘바보 성자’였는지 모른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압제를 상징하는 멍에를 메고 다녔으며, 호세아는 음란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여인과 결혼한다. 이런 해프닝은 역설적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한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정말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것이다.

이런 바보 성자들은 기성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당대의 기준을 거스르며, 이를 무효로 만든다. 이런 고대의 성자들이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낮춤으로써 진정성을 얻었다면,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여김으로써 결과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민주적인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는 성직자들의 권위적인 태도와 봉건적 옷차림,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교회언어로 무장된 신자들의 자발적 ‘종노릇’은 때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바보 성자들은 세상에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고 폭행당하고 쫓겨나곤 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적빈(赤貧)의 처지였던 예수님은 평생 노숙과 굶주림으로 힘겨운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평생 광야에서 금욕적 수행자처럼 살지는 않았다. 유다 지도층이 볼 때 어느 것 하나 거룩하달 게 없었던 예수님이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퍼포먼스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저주받은 자의 상징처럼 여겼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바보 성자의 전형이 예수님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겸손한 임금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이런 사람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테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임을 드러냈다. 이분은 율법과 시대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고, 논쟁을 일삼았고, 가난하고 가련한 인생을 ‘무조건’ 편들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타자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갔고, 자신을 조롱거리로 내놓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두고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그런 방법으로 진리를 드러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지, 세상에 오염되는 분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분은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거룩하신 분이다. 러시아정교회에 이런 신학논쟁이 있었다 한다. “성수대에 파리가 빠지면 성수(holy water)가 오염되는가, 파리가 성화되는가?” 거룩함은 부패한 것조차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수를 보호하려고 교회 뚜껑을 닫아놓을 필요는 없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대로 거룩한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을 믿기에,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물며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희망해야 한다.

 

Saint Michael of Klopsk, the Fool for Chris

그리스도인의 라이프스타일

종교를 공간적으로 성전에 가두어둘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요즘은 종교 언어가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한편, 세속 언어가 종교적 신비를 풀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10분 동안의 강론에서 얻지 못한 전율을 3분 짜리 대중가요에서 얻고 있다. 교회나 성당에서 만나지 못했던 압도적인 거룩함의 경험을 광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우리 신앙의 보호막과 이름표를 떼어내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오직 그 맛으로만 평가한다면, 교회와 세상이 내놓는 언어 가운데 어느 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쇼핑광고와 정치연설, 대중가요마저 종교적 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어디서 발견할지 궁금하다. 이럴 때 판단의 잣대는 한 집단이 표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라이프스타일이다. 그 삶이 매력적이고 복음적이면 거기에 구원이 있다.

<가난한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Rich Christian in an Age of Hunger)이라는 책에서 로널드 사이더는 미국 중산층 복음주의자들을 분석하면서, 신앙인들이 자본주의에 길들여졌다고 비판했다. 수많이 이들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동안에도 신앙인들은 풍요를 누리면서 ‘경제 불평등’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탄식했다. 그는 신앙인들에게 ‘단순한 삶’(simple Lifestyle)을 주문했다. 자발적으로 ‘평등한 가난’을 살면서 여유분을 굶주리는 이들과 나누라는 전갈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는 소설에서 찰스 쉘던은 교회에 찾아온 노숙인을 만날 때마다 교회 신자들에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는다. 한 때 이 말이 유행이 되어 목걸이, 팔지, 티셔츠에 약칭인 ‘WWJD’를 새겨넣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신앙인들은 지금과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프랑스의 개혁그룹인 왈도파(Waldensians)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청빈한 삶으로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별칭을 얻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청빈의 삶을 시작하였다. 수도자들은 세속을 등지고 전적으로 거룩한 삶에 자신을 봉헌한 것처럼 보여서 신비에 싸여 있다. 허나 수도생활 역시 먹고, 자고, 공부하고, 노동하는 일상의 삶을 재배치한 것에 불과하다.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과 공동체 자매형제들과 겪는 어려움은 세속에서 우리가 겪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처럼 수도생활이 신앙의 비닐하우스가 아니라면, 거기에서 수련한 것이 검증되어야 할 장소는 비닐하우스 바깥 세상이다.

‘공간의 신앙’이 거룩함의 영역을 교회에서 세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면, ‘시간의 신앙’은 종말론적 비전 안에서 ‘지금여기’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 일상의 거룩함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로 결정된다. 오늘 하루의 식량을 두고 감사하는 삶은 ‘순간’을 포착하는 신앙에서 나온다. 이걸 ‘세계 내 경건’이라고 부르든 ‘세속에 스며든 거룩함’이라고 부르든 먹고 마시는 행위를 성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이라야 ‘세속성자’이다.

라이프스타일은 음식, 건강, 패션, 레저, 여행, 예술, 대중문화, 독서, 공연, 취향, 성, 취미 등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로 어떻게 여행할 것인지 늘 선택의 갈림길 위에 있다. 이런 자잘한 욕망을 복음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성인이 멀리 있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주는 결정적 지표는 ‘소비’다. 어디에 시간과 돈을 쓰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일상에서 비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소비를 줄이고 욕망을 억제하는 게 능사도 아니다. 오히려 욕망의 방향을 ‘사랑’으로 돌리는 데서 출구가 보인다. 명품백이나 브랜드 운동화를 원하는 만큼이라도 이웃사랑을 갈망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응답받는 기도에서 응답하는 기도로

세속성자가 되고자 할 때 사실 기도처럼 어려운 게 없다. 내 기도에 하느님이 응답해 주시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보상을 바라게 된다. 특히 아픈 식구가 있으면 기도는 더 간절해지고, 하느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치유해 주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종교는 불가피하게 ‘복을 비는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려움이 클수록 종교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고민이 따라온다.

기도가 하느님께 닿지 않는다면, 그래서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밑바닥부터 흔들리기 쉽다. 자크 엘룰은 <불가능한 기도>(The impossible Prayer)라는 책을 썼다. 우리의 기도에 매번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하느님이 응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다. 하느님께 응석부리고 매달린다고 그분이 꼭 응답할 이유가 없다. 양희송은 이런 기도가 “끝없는 희망고문”을 낳기도 한다고 염려한다.

기도하면 들어주시리라 자신을 세뇌시키며, 한사코 하느님께 매달리게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투정도 있다. 어떤 성직자는 ‘만사형통 기도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참 무망한 일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래 반복적으로 한다고 더 나을 게 없다.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게 응답을 요구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찾고 거기에 내 삶으로 응답하는 기도가 요청된다. ‘주님의 기도’처럼 기도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럴 때 기도는 내 뜻을 하느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의 원의를 맡겨드리는 행위가 된다. 나를 온통 그분이 차지하시도록 개방하는 자리가 기도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년 12월-2019년 1월호(통권 16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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