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처음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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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처음 만나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8.11.13 00: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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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1

[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굻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께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큰 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좀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와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11-32).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작품과의 만남-1포스터

렘브란트의 작품, <돌아온 아들>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한 포스터와의 평범한 만남이 나의 긴 영적 모험을 시작하도록 했다. 그 모험은 나의 소명에 관해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끌었고 그 소명을 살아갈 새로운 힘을 주었다. 이 영적 모험의 중심에는 17세기의 그림과 작가(렘브란트)가 있고, 1세기의 비유와 그 저자(예수),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20세기의 한 사람(나웬)이 있다.

이야기는 1983년 가을, 불란서의 트로슬리 마을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 때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주는 공동체인 라르슈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있었다. 트로슬리 공동체는 1964년 캐나다 사람 쟝 바니에가 창설하여 전 세계에 90개의 공동체가 퍼져있는 라르슈 공동체들 중에 첫 번째 공동체였다.

어느 날 나는 공동체의 작은 자료 센터로 친구 시몬느 랑드리엥을 만나러 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의 눈은 시몬느의 방문에 핀으로 꽂혀있는 큰 포스터에 멎었다. 커다란 붉은 망토를 입은 한 남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너덜너덜한 옷차림을 한 청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인물 사이의 친밀함에, 그 남자의 따스한 붉은 망토에, 청년의 금빛 나는 누런 겉옷에, 그리고 두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빛에 이끌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손이 –노인의 손– 청년의 어깨를 만졌을 때에 나는 그 전에 결코 있어 본 적이 없었던 곳에 와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나는 시몬느에게 말했다, “저 포스터에 대해 말해 주세요.” 그는 말했다, “아, 저건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복사판입니다. 맘에 드세요?” 난 계속해서 포스터를 응시하고 있다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아름답군요, 아름다운 것 그 이상입니다... 포스터를 보니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지만, 여하간에 너무 감동적입니다.” 시몬느가 말했다, “아마 포스터를 하나 직접 구입해야겠네요. 파리에서 살 수 있어요.” 나는 “예, 꼭 한 장을 사야겠어요.”

돌아온 아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침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6주 동안 중미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전쟁을 막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가능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여행을 끝낸 참이었다. 나는 너무 피곤했고, 걸음을 옮길 기운조차 없었다. 나는 불안했고, 외롭고, 쉴 수가 없었으며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다니는 동안 나는 정의와 평화의 강한 투사처럼 느꼈고, 두려움 없이 어두운 세계를 직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정이 끝난 후에는 어머니의 무릎을 파고들며 울고 싶은 연약한 아이처럼 느껴졌다. 박수치거나 비난하는 군중이 사라지자 나는 황량한 외로움을 경험했고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휴식을 약속하는 유혹의 소리에 그냥 나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시몬느의 사무실 문에 붙어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림을 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단번에 벅차올랐다. 내 자신을 소진시켜 버린 긴 여정 후, 아버지와 아들의 부드러운 포옹은 그 순간 내가 갈망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긴 여행에서 완전히 소진된 아들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안아주기를 원했다.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었다. 아들의 집으로의 귀환이 바로 나의 전부였고 내가 되고 싶은 모든 것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면하고, 간청하고, 훈계하고, 위로하며 돌아다녔다. 이제 나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리에 그저 안전하게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지독한 피곤은 사라졌지만 그리고 가르치고 여행하는 일상의 생활로 돌아갔으나, 렘브란트의 포옹은 그 어떤 다른 일시적인 감정상의 지지보다 훨씬 더 깊숙이 내 영혼에 각인되어 새겨졌다. 포옹은 바쁜 일상의 굴곡진 움직임을 훨씬 넘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염원을 표현하는 어떤 것, 마지막 귀환에 대한 갈망, 안전에 대한 확실한 느낌, 영원한 집에 대한 느낌과 만나도록 나를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과 바쁘게 어울리고, 많은 문제에 관여하고, 많은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돌아온 아들의 귀환은 나와 함께 있었고 계속해서 나의 영적 삶에 점점 더 의미가 커져갔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일깨워준 영원한 집에 대한 염원은 갈수록 더 깊어지고 강력해져서, 작가 자신을 나의 충실한 동반자요 안내자로 여기게 되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본 지 2년이 지난 후, 나는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트로슬리의 라르슈 공동체로 돌아가 일 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런 선택의 목표는 내가 라르슈 공동체에서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초대를 받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한 해 동안, 나는 특별히 렘브란트와 그의 돌아온 아들 그림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나의 네덜란드 동료가 특별한 친구로 찾아온 것 같았다. 그 해가 다 끝나기 전에, 나는 토론토에 있는 라르슈 공동체인 새벽 공동체에 합류함으로써 나의 새로운 집을 결정했다.

작품과의 만남-2■그림

헨리 나웬

트로슬리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나는 친구인 보비 마씨 부부로부터 소비에트 연방 여행에 초대받았다. 나는 즉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겠네.” 이 위대한 작품에 관심이 생긴 후, 나는 그림의 원본이 1766년 캐더린 대제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혁명 후 레닌그라드라고 불렸으나 최근에 다시 본래 지명을 되찾았다). 나는 그림을 그렇게 빨리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림을 보러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라르슈에서 영구적으로 살겠다는 결정과 소비에트 연방 방문이 매우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그 연결점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그림을 보는 것이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신비로운 방식으로 집에 돌아가도록 해줄 것이라고 느꼈다.

소진된 강연으로부터 안전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선생들과 학생들의 세계를 떠나 정신장애를 지닌 남녀들의 공동체로 살려고 가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벽과 삼엄한 경비원들에 의해 나머지 세계와 격리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 고유한 방식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집으로 돌아가는” 의미들 아래 혹은 너머에는 팔을 크게 벌리고 나를 기다리며 영원한 포옹으로 나를 안아주고자 하는 존재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렘브란트가 이와 같은 영적인 집으로의 귀환을 깊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렘브란트가 돌아온 아들 그림을 그렸을 때, 그는 자기의 진정한 집 그리고 마지막 집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만일 렘브란트가 아버지와 아들, 하느님과 인간, 연민과 비참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원 안에 그렸던 그 자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면, 나는 죽음과 삶에 대하여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느꼈다. 또한 나는 렘브란트의 걸작을 통하여 어느 날 사랑에 대하여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느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사진출처=klook.com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는 것과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돌아온 아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기회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하여 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그림을 볼 수 있기 위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고 어떻게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내 걱정은 해결되었다. 공식적인 방문 일정이 끝나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갔다. 그러나 보비의 어머니, 수잔 마씨가 미술관에서 일하는 친구를 소개해 주었고, 1986년 7월 26일 오후 2시 30분, 마침내 나는 그림 앞에 섰다. 거의 3년 동안 내 마음과 정신 속에 있었던 그림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그림의 위엄 있는 아름다움에 멍해졌다.

그림의 크기는 실제의 삶보다 컸다. 그 풍부한 붉은색, 갈색, 그리고 누런색. 그늘진 구석들과 밝은 앞부분, 그러나 무엇보다도 빛으로 감싼 아버지와 아들의 포옹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알 수 없는 방관자들, 이 모든 것이 나의 예측을 훨씬 더 넘어서는 강렬함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아마도 그림 실물이 나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정반대였다. 그림의 웅장함과 광휘가 모든 것을 밀어내고 나를 완전히 포로로 만들었다. 그림을 보러 가는 것은 참으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많은 관광객 그룹들이 안내인을 따라오고 빠르게 계속 떠나갔다. 나는 그림 앞의 붉은 벨벳 의자에 앉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나는 진짜로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큰 아들과 다른 세 인물도 보고 있다. 그것은 높이 8피트 넓이 6피트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유화 걸작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냥 그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보고 싶어 했던 작품 앞에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음미했을 뿐이다. 나 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지 미술관에 앉아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돌아온 아들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즐기고 있었다.

그림은 80° 각도의 가까이 있는 큰 창문을 통하여 자연의 빛을 충분히 받으며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가장 알맞은 위치였다. 그곳에 앉아 있어보니, 오후가 되면서 빛이 더 충만해지고 더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후 네 시쯤에, 햇빛은 그림을 새롭게 밝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배경의 인물들–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던–이 그들의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저녁이 가까이 되자, 햇빛은 점점 더 윤곽을 또렷하게 그리고 색조를 띄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포옹이 더 강력해지고 더 깊어진다. 옆의 구경꾼들은 화해, 용서, 그리고 내적 치유의 이 신비로운 사건에 더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점차 나는 빛의 변화에 따라 돌아온 아들 그림들이 수없이 많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자연과 예술의 이 자비로운 춤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렇게 그림을 바라보면서 어느 새 두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미술관 측의 배려로 잠깐 쉬면서 커피와 과자를 들 수 있었다. 수잔의 친구 알렉세이와 동료들은 내가 왜 그렇게 그림에 매료되었는지 매우 궁금해 했다. 그들은 그림에 대해 내가 영적인 관찰과 성찰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고 약간 당황해 하기조차 했다. 그들은 주의 깊게 내 설명을 들었고 더 말해달라고 졸랐다.

커피를 마신 후, 나는 경비원과 청소원이 와서 단호하게 미술관의 문 닫을 시간이 되었고 내가 충분히 오래 있었다는 것을 말할 때까지 또 한 시간을 그림 앞에 머물렀다.

나흘 후, 나는 그림을 보러 다시 미술관에 갔다. 그리고 네 시간 이상을 그림 앞에서 보냈다. 나는 경비원들과 관광객들이 말하는 것, 햇빛이 강렬해지고 사라질 때에 내가 본 것, 그리고 예수님이 말했고 렘브란트가 그린 이야기에 점점 더 몰입하며 나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경험한 것에 대해 적어놓았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보낸 이 소중한 시간들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것인가가 나에게 궁금함과 약간의 걱정으로 다가왔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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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원 2019-07-14 10:30:54
돌아온 탕자 시리즈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실어주신 편집장 님께 감사드립니다. 시리즈가
몇회까지인지, 언제 마지막회가 실리는 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