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부르는 사랑" 예수의 사명은 하느님 왕국의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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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부르는 사랑" 예수의 사명은 하느님 왕국의 선포
  • 죠지 쏘아레스 프랍후 신부
  • 승인 2018.11.1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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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사회정의-2

예수는 가난과 착취가 없어지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선포하였다. 이 새로운 질서는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바탕으로 이룩될 것이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인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알려준다(마태 11,27).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바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마태 5,43-48) 그러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간을 한 형제자매로서 사랑하게 되는 체험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회개,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마태 4,17)를 가져올 것이며 이어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해방(마음과 구조의 변화)의 운동을 일으킬 것이며 진정으로 형제적인 사회(마태 23,8-12), 자유와 동료애와 정의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사회를 향하여 움직여 나갈 것이다.

 

하느님 왕국의 자유

하느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예수의 체험은 인격적인 차원에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다. 그러한 체험은 두려움과 강박관념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두려움과 강박관념은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뿌리 깊은 결핍과 불안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어거스틴 성인이 말했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으며 우리의 마음은 그분 안에 쉬기까지 쉴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은 강박적으로 지위와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그의 삶 안에 커지는 공허를 메꾸려고 애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무조건적 사랑과 수용만이 줄 수 있는 근본적인 안정이 부족하여 매우 불안해한다. 그래서 두려움과 이웃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절박한 요구 때문에 진정으로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은 이러한 태도를 변화시킨다. 사랑이 그의 마음을 너무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사물이 주는 과도기적인 만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그가 매우 귀중한 존재라는 의식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므로 더 이상 타인의 인정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자유의 최고 유형이다. 복음 전체에서 그는 최고의 자유인으로 나타난다. 그는 욕심이나 야망이 전혀 없다.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머리 둘 곳조차 없고’(루카 9,58),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마르 10,45) 왔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여론의 압력을 받지 않았으며(요한 8,1-10), 기존 권위의 폭력에 굽히지도 않았다(루카 12,31-33). 전적인 자유로서 그는 동료들에 대한 사랑이 요구할 때에는 지체 없이 가장 성스러운 체제에까지 도전했다. 그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으며(마르 2,23-28; 3,1-6), 정결예식을 무시하였고(마르 7,1-15), 나환자를 어루만지고(마르 1,42), 사회적으로 낙오된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밥을 먹었다(마르 2,15-17 : 루카 15,1-2).

예수는 그의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위대한 자유의 전설을 남겨주었다. 예수의 온 사명은 모든 형태의 구속에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를 죄와 잘못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마르 2,1-12 : 마태 26,28). 그는 악마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으며(마르 1,21-28), 무의미한 일상사나 형식적인 전례주의(마태 6,7), 그리고 율법의 억압적인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마태 11,28-30).

그는 사회가 거부하는 이들을 절망적인 고립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추방되었으며(루카 19,1-10) 율법적으로 불결하고(마르 1,40-45) 정신적으로 병들었다고(마르 5,1-2) 단죄받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소유물의 어지러운 무게로부터 해방되며(마르 1,16-18; 10,17-23 : 마태 6,24), 지나치게 가족관계에 집착하지 말라고(루카 9,16) 설교한다. 그는 그들에게 사랑의 힘을 불어 넣는다(루카 7,36-40).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오는 이 날아갈듯한 자유는 너무나 절대적인 것이므로 삶 속에서 어떤 다른 안정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마태 6,25-34). 이 진정한 자유가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기초인 것이다.

 

하느님 왕국의 동료애

예수가 주는 자유는 우리를 상호 사랑의 친교에로 이끈다.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체험에서 생겨난 하느님 나라의 이 자유는 사랑에 복종하도록 자유로운 사람을 충동한다.

바오로 사도는 자유와 노예상태를 변증법적으로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라고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한다(갈라 5,1). 그러나 이어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13).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 자신에 대하여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코린 9,19).

하느님나라의 자유는 이기적인 방종이 아니라 투신으로 완성된다. 그 자유는 봉사하기 위한 자유이다.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향하는 자유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체험하여 태어난 예수의 이 자유는 우리가 이웃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에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에,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자기자신을 자유롭게 포기할 때에만 비로소 진정한 자기자신이 된다. 자신의 생명을 잃음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마르 8,35).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로운 노예가 됨으로서!) 자유를 지킬 수 있다. 인간자유의 궁극적인 목표와 완성은 바로 사랑이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친교를 외쳤던 예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쳤다(루카 6,27-36; 10,25-37). 유대교의 위대한 계명은 신명기 6,4-9의 ‘이스라엘아, 들어라!’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이 계명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아끼라는 레위기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19,18)을 더욱 심화시킨 예수의 ‘사랑의 계명’(마태 22,34-40)에 이르러 완성되고 있다. 하느님을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친다. 이웃을 사랑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의 특별한 이 사랑의 계명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계명인 것이다.

마태오 복음 22,34-40과 같은 의미의 마르코 복음 12,28-34, 루카 10,25-28에 나타난 이 사랑의 계명 외에 신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결코 재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약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 나라의 법을(야고 2,8 : 로마 13,8 : 갈라 5,14 : 베드 4,8 : 히브 13,1) 끊임없이 선포하고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의 새로운 계명(요한 13,34;15,12 : 1요한 3,23; 4,7-12 : 2요한 1,5)을 말하고 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가장 적절히 응답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되돌려 그 사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은 우리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1요한 4,12)라는 말씀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깊은 관심인 동료애는 예수가 선포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최상의 가치인 것이다.

하느님 왕국의 정의

진정한 동료애가 있는 곳에 정의는 꽃필 것이다. 예수가 불붙였던 사랑은 말로서만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난 효과적인 사랑이며(1요한 3,18), 인간의 영적인 요구뿐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전체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사랑인 인간에 대한 비심판적인 용납(로마 14,1-14)과 용서, 화해 혹은 인내와 친절, 아량(1코린 13,4-7)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똑같은 정도로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신약이 충격적으로 자주 주장하듯이 이웃의 물질적 차원의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하는 사랑, 또한 가난하고 굶주리며 병들고 소외되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마태 25,31-46 : 1요한 3,17 : 야고 2,14-16)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여부에 따라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그러한 사랑이 또한 하느님나라의 사랑인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고 참다운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조차 빼앗아가는 불의한 사회, 경제, 정치 제도 앞에서 수동적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산발적인 구호활동으로 이러한 불의한 구조의 희생자들을 구제하는 일로 만족하고 있을 수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구조 자체에 도전하고 그것들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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