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권력이 되고, 전쟁은 정당화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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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권력이 되고, 전쟁은 정당화 되고
  • 박충구
  • 승인 2018.11.06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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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 거부의 평화신학적 이해, 재세례파 신앙을 중심으로-1

2,000년 기독교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평화사상은 다양한 변종을 낳았다. 요더(John Howard Yoder)의 <Nevertheless>에 담겨있는 22가지 평화주의가 바로 그런 변종들이다. 평화주의에는 성서적 전통에서 비롯된 평화주의도 있고, 비성서적인 철학적 전통도 있고, 다른 종교 전통이나 무정부주의적인 평화주의도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전쟁을 하면서도 평화를 찾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실천하면서 평화를 실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총을 가진 평화주의자가 있고 총을 들지 않는 평화주의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주의 일반을 개념화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평화를 말할 때 스스로 물어야 하는 것은 ‘어떤 평화’를 우리가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어떤 평화를 말하는가?

나는 성서 속에 담겨있는 예수의 평화사상을 예수의 정치사상으로 이해한다. 정치란 힘의 관계, 혹은 폭력이나 지배에 대한 태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정치윤리로서 평화윤리는 사실 무척이나 다양한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 일단 평화라는 개념이 지닌 개념적 반지름이 그리는 범주는 곧 그 평화 사상의 적용범주가 된다. 따라서 평화사상의 반지름이 길고 짧음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평화를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가장 반지름이 짧은 평화는 ‘나의 평화’, ‘내 영혼의 평화’ 혹은 ‘내 마음의 평화’ 일 것이다. 수도원에 들어가 자신의 평정을 지키려 했던 수도사들의 평화가 그런 것이다.

관계적 평화도 있다. 관계가 개입되면 힘의 소재가 중요해진다. 가부장적 평화는 남성 우선성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불평등한 평화다. 지배자가 말하는 평화는 지배자 중심의 평화이고, 인종주의적 평화는 자기 인종을 우선 고려하고 대우하는 평화를 말한다.

지난 5월 이슬람권 사람들이 정치적 박해를 벗어나 우리나라에 망명을 요청했을 때 기독교 일각에서는 ‘우리의 평화’를 해치는 요구라며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누구나 평화를 말하고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평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의 평화?‘, ’어떤 평화‘를 말하고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루려 하는 초점은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가르친 평화‘다. 일단 이 평화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 후에, 예수의 평화를 기독교 전통이 어떻게 이해하여 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한 축으로서 재세례파 교회가 이해하는 예수의 평화 이해를 규명하는 데까지 나가려 한다. 이런 단계적 이해 구조는 우리 각자 가지고 있는 평화 이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제다.

나는 평화사상이란 곧 그 사상을 가진 이의 정치적 행위를 필연적으로 결과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평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유 범주, 행동 범주, 그리고 삶의 태도가 결과하는 것이다. 삶의 태도를 결과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지 사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살피려하는 것은 간혹 살고 죽는 일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상으로서의 평화“다.

 

예수의 평화사상

예수가 그의 짧은 공생애 기간 중 가르친 평화사상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간혹 이 사상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고, 간혹 이 사상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살았다. 나는 예수의 평화사상을 일종의 종교적 사상이라고 개념화하기보다 일단 예수의 정치사상으로서 평화사상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예수의 평화사상은 예수의 경제윤리, 예수의 성윤리, 예수의 문화윤리, 예수의 생명윤리 등등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들 중 매우 중요한 원류라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수의 평화사상은 유대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평화사상의 배경이 되는 것은 구약성서의 평화사상(shalom)이며, 이 평화사상의 근간은 계약법전(탈출 20,22-23,33)이고, 계약법전의 모태는 창조주 하느님 신앙(자비로운 하느님 신앙)이다. 이 세 가지 사상적 연원은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정치, 즉 하느님 나라 지평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주권은 지배적 권력의 표상이 아니라 찾아오시는 하느님, 곧 성육신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2) 예수의 평화사상은 하느님 나라의 주권을 겸허히 수용하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의 하느님 품성에 따라 ‘사랑의 의무‘(요한 13,34-35)를 배태한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은 여기서 동의어가 된다. 즉 원수가 이웃으로 여겨지는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의 윤리에는 보복의 윤리과 폭력과 지배를 위한 자리가 없다(마태 10,46-52).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가 대표형이다.

3) 불의한 세상에서 자기 보존과 자기 보호의 요구를 보장하지 않는다. 원수 사랑의 길은 원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삶, 곧 검을 버리는 길(마태 26,47-56)이다. 따라서 예수는 악에게 저항하지도 말라고(마태 5,39) 가르친다.

4) 위의 사항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평화사상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었고(요한 14: 27), 평화를 빌었으며(요한 20: 19-23),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가르쳤다(마 5: 9).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어록을 중심으로 살펴본 예수의 정치윤리로서 평화사상은 지배윤리가 아니라 섬김의 윤리를,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을, 보복의 윤리가 아니라 사랑의 윤리를, 기능적인 평화가 아니라 본원적인 평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평화사상을 예수는 포악한 로마제국 속에서 가르치셨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황제보다 하느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삶을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로마의 평화의 허구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마 20: 25),

로마의 평화 그것은 힘에 의한 평화로서 참된 평화를 파괴하는 평화였다. 로마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를 가르는 기준은 충성과 복종의 대상에서 다르다. 로마는 제국주의를 위한 충성에서 평화를 찾았고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접근성에서 평화를 찾았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단호하게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고 했다. 심지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5,48)라고 요구했다. 이 완전함의 총체적 개념은 평화, 샬롬이다. 이런 예수의 평화 사상은 그의 산상설교(마태 5-7장)에 집약되어 있다.

교회의 역사와 예수의 평화사상

초기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회상과 증언을 중심한 공동체’였다. 예수와 더불어 살았던 제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했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성서 텍스트 없이 기억을 통한 회상과 증언 공동체였다. 아마 이 시대가 가장 정확하게 예수의 사상이 이해된 시대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성서 본문에서도 다소 상이한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이 시대 이후부터는 성서적 증언에 대한 “해석에 의존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회상과 증언 공동체’에서 ‘해석 공동체’로 변이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를 불러온 중요한 요소는 시대마다 다른 ‘문화 사회적 정황’(cultural and social condition)이다.

소수자의 종교였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트뢸취의 이해에 의하면 ‘예수의 순수한 종교적 가르침’에 헌신하는 공동체였다. 이들은 예수의 말씀을 ‘새 법‘으로 받아들이고 이 새 법에 따른 삶에서 기독교인의 자기 정체성을 찾았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중 하나로 인정한 313년 이전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이후의 기독교와 구별된다.

첫째, 로마 제국 안에서 기독교 인구는 비교적 적었고 따라서 권력화 되지 않았다. 이 시대에 크고 작은 박해가 7차에 걸쳐 일어났던 것은 기독교와 로마의 중심 세력이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로마 제국의 제국주의적 포악과 연대를 나누거나 화해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평화주의적 실천가들이었던 무수한 순교자들이 나왔다.

서기 100년경부터 165년까지 살았던 져스틴(Justin Martyr)은 황제에게 보낸 1차 변증서신에서 기독교인의 특징을, “관습상 다른 부족들과 상관도 하지 않고 증오와 살인을 하던 이들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더불어 살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가 되었다.”(First Apology, No. 14)고 묘사 했다.

그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기독교인을 오해하여 인육축제, 근친상간을 즐기고 반역을 도모하는 반사회사범이라는 풍설이 옳지 않다는 변증서를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쓰면서 그리스도인은 ”언변을 연습하기보다는 선한 행위를 증거하고 뺨을 맞아도 되 보복하지 않고, 빼앗겨도 관헌에게 고소도 하지 않으며, 누가 달라고 하면 내어주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A Plea Regarding Christians, No. 11)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변증했다.

초기 교회의 평화의 영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문서(Letter to Diognetus)는 저자와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기독교적 삶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는 기독교인을 일러 ”그들은 자기 나라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낯선 이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수고하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법에 순복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법이 요구하는 것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박해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무명의 사람으로 저주받은바 되어 죽음을 당하지만 그들은 영생에 이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부유하며, 그들은 매우 궁핍하지만 온전한 풍요를 누립니다. 그들은 불명예를 겪지만 그 속에서 그들은 영화롭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요약하자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 영적인 크리스쳔은 육신의 것이 영적인 것을 미워하므로 고난을 겪지만 결코 육신의 것들이 궁극적인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터툴리안(c.155-c.225) 역시 그의 변증서(Apology)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을 받았다면 우리가 도대체 미워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해를 당해도 앙갚음하지 말라는 것인데 누가 우리에게 고통을 겪는단 말입니까?”라고 기록함으로서 보복의 윤리가 아니라 사랑의 윤리의 실천적 지평이 기독교적 삶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오리겐(c. 185-c. 253)은 모세의 보복의 윤리가 국가적 차원에 적용되었지만 예수의 사랑의 윤리는 원수를 살해하거나 원수가 돌에 맞아 죽기를 바랄 수 없게 만든다면서 “열방은 예수의 가르침(사랑의 법)으로부터 유익함을 얻어야 한다“(Against Celsus)고 주장했다.

초대교회 인물로 알려진 막시밀리안(Maximillian)은 로마 군대의 표를 억지로 받으라는 상관의 명령에 반하여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받지 않겠다. 만일 그것을 억지로 내게 준다면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것을 땅에 내팽개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했으니 이 세상의 군대에 속할 수 없다.” 라고 단호히 주장함으로써 로마 군인이 되기를 거절했다. 그는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부대장의 위협 앞에서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내 영혼은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라고 자기 신앙을 변증했다.

로마군의 병사였던 마르셀로스(Marcellus) 역시 막시밀리안과 유사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황제의 생일이 되어 이교 축제가 시작되자 그는 로마 병정 허리띠를 풀어 땅에 던지면서 “나는 영원하신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병사다. 이제부터는 황제를 섬기는 일은 하지 않겠고 돌과 나무로 만든 귀먹고 보지 못하는 우상을 섬길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이 일로 그는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는 이는 이 세상의 군주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이 초기 평화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회상과 증언 공동체의 힘을 잃게 되었다. 예수의 부재(不在)에 이어 제자들의 부재로 이어졌고, 예수를 목격했던 증언을 들었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상과 증언 공동체’의 생생한 신앙은 퇴조하고 ‘해석 공동체’로서 기독교 공동체가 스스로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 국교화는 결정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견지하던 예수의 평화사상의 약화로 이어졌다. 핍박받던 종교가 이단자를 척결하고 로마의 권력을 옷 입은 지배종교로 변형되어 갔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어떻게 지배 종교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소위 콘스탄틴적 대전환을 불러온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가 바로 어거스틴(354-430)이다.

어거스틴 신학의 체계는 사실상 오늘날 기독교가 견지하고 있는 주요 교리의 원형으로 평가된다. 그는 기독론, 교회론, 창조론, 종말론, 원죄론, 예정론, 성례전 등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뼈대를 만들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소수자 종교’로 만족하지 않고 로마 제국과 연대를 나누는 힘의 종교로 기독교를 개변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다. 즉 소수자의 종교가 아니라 다수자의 종교로, 약자의 종교가 아니라 강자의 지배적 종교로, 그리고 예수의 평화만이 아니라 로마의 평화까지도 담아내려는 타협적인 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무엇을 희석시키고 무엇을 강화하는 타협을 이루어 냈을까?

그 타협의 핵심을 나는 예수의 평화사상을 희석시키는 대신 원죄론으로 그것을 덮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관심인 예수의 평화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당시 일어난 가장 커다란 변화는 초기 기독교가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여겼던 예수의 평화사상 대신 암브로스(340-397)에서 발아한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을 발전시켜 기독교의 한 교설로 제시한 데 있다.

이 이론은 상징적으로 초기 기독교 신앙인들의 순교적 평화 신앙을 약화시키고 기독교가 로마의 폭력을 수용하기 위하여 대문을 열어준 것과 흡사하다. 이후 기독교 주류는 권력 종교가 되었고, 중세를 거치면서 제국 권력의 반을 나누어 가졌으며, 그 위에 영적 권력을 더 가진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

아퀴나스(1225-1274)에 이르러 서방 기독교는 지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권력 종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데오도시우스 황제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하고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교회 역시 동서로 나뉘어져 5세기 경 베드로 수위권 다툼을 하는 등 권력 종교로서의 절대성 다툼을 벌이다가 필리오케 논쟁에서 극한 대립을 보이다가 십자군 전쟁기(1054)에 서로 파문하여 적대적인 관계로 돌입했다.

권력종교의 호전성은 로마제국의 군대의 호전성을 독려했을 뿐 아니라 같은 기독교도라 할지라도 조그만 사상적 차이만 있으면 극심한 배타와 호전성을 드러내는 종교로 변모해 왔다. 급기야 지상권을 획득한 기독교는 종교재판소를 차리고 이단자를 처형하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제국 안에서, 제국에 의하여 벌어지는 각종 전쟁을 지지, 용인하게 되었다. 이른바 기독교 세계(Christendom)를 이루어 낸 것이다.

액턴(John Dalberg-Acton, 1834-1902) 남작이 주장했던 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말과 같이 절대 권력화된 종교는 절대 부패했다. 로만 가톨릭교회의 위세는 1077년 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던 그레고리 7세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고, 1095년 우르반 2세에 의하여 유럽 사회를 넘어 소아시아 지역가지 종교 전쟁의 광기로 밀어 넣었다.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기독교도가 생명을 학살하는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이다. 정당한 전쟁론을 넘어 십자군(crusade) 사상을 옷 입은 종교는 매우 잔인해 졌다. 이단자나 이교도 처형을 당연시했고 1096년에는 폭도화된 십자군이 라인란트 지역에서 유태인을 잡아 죽이는 학살까지 일어났다. 초기 희생자는 1만 명이 넘었고, 보름스( Worms)에서만 800명, 마인츠(Mainz)에서 1,100명의 유대인들이 잡혀 죽었다.

‘십자군 정신은 적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불순한 존재로 간주하여 기독교적 자비와 시혜의 대상에서 완벽하게 제외시킴으로써 남녀노소는 막론 유아까지 학살하는 잔인성을 동반하였다. 결국 십자군의 정신세계에서 예수의 평화사상은 완벽하게 증발하고 권력종교의 광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도덕적 판단과 사유를 정지시켜왔다.

박충구 교수
감신대 기독교윤리학과
저서로 <종교의 두 얼굴-평화와 폭력>, <예수의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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