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원 포인트 레슨 “하느님은 자비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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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원 포인트 레슨 “하느님은 자비하시다”
  • 김경윤
  • 승인 2018.10.2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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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예수님은 과자를 주시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과자 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아요. 우리 남편 취직시켜 달라, 우리 아이 대학 보내 달라. 병을 낫게 해 달라. 이런 건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느님께 미루면서 땡깡을 부려서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릴 때 무언가 부탁하는 존재가 하느님이었다면, 이제 나이가 먹으면서는 그분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가 살펴야 해요. 이젠 그분이 하시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게 성숙한 신앙이겠지요.

천명을 찾아 나서는 신앙

공자는 쉰 살에 지천명(知天命)하였다는데, 나이가 들면 하늘의 부르심을 알아듣는 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서, 젊어서 그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요. 부처님처럼 예수님도 스물아홉 살에 출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왕좌도 사랑하는 아내도 가여운 자식도 다 두고 출가해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개고생 했을 겁니다. 아마 그 한 소리를 듣고자 목숨을 걸고 도약했을 겁니다.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부처님은 여든 살 가까이 살았으니 50년 이상 종교적인 비전을 실험해 볼 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고작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정도 공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던 분이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 이전에 어떤 깨달음이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느냐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과연 뭘 깨달았기에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겁니다. 

 

사진출처=pexels.com

예수는 ‘우리의 죄’에 주목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원 포인트 레슨(One Point Lesson)은 뭘까요? 부처님은 인생은 고통이라 했어요. 부처님은 그 고통을 극복하려면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없애는 방식으로 세팅하라고 합니다. 그걸 무아(無我)사상이라고 해요. ‘나’라는 게 아예 없다는 겁니다. 또한 영원한 것도 없으니 ‘무상’(無常)입니다. 그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가변적인 존재이고, ‘나’는 나 스스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사는 수밖에 없고, 그 존재도 끊임없이 변한다고 말합니다.

인연에 따라 맺어지고 인연이 다하며 헤어집니다. 이게 우주를 구성하는 방식이라면,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때문에 인생을 뒤집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에 머물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집착이 없습니다. 욕망조차 일시적이니, 그 불을 끄는 경지에 이른 것을 니르바나, 해탈이라고 해요. 해탈이란 불을 훅 불어서 끈다는 뜻입니다. 이게 부처님의 원 포인트 레슨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원 포인트 레슨은 무엇일까요? 이걸 찾아내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그 짓을 했구나, 그것 때문에 죽고 말았구나, 그것 때문에 그분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돌고,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원 포인트 레슨은 그분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워낙 큰 죄를 지었고, 스스로 그 죄를 갚을 도리가 없고, 하느님이 가학성이 있어서 아드님을 세상에 내려보내 희생제물로 삼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대속신앙은 좀 유치한 구성입니다. 사실 우리 세계관에는 죄성(罪性, sinful nature)이라는 게 없어요. 죄를 가지고 사람에게 장난질하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에게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고, 신적 요소와 동물적 요소가 결합되어 사람을 널리 복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원죄사상을 구성한 것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걸 예수님의 원 포인트 레슨이라고 하기엔 정말 후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민주시민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 죄를 누군가가 대신 책임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회개하고 잘못한 만큼 벌을 받고 갱신되는 것이죠. 그게 민주시민의 자질인 거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누군가 대신 벌을 받고, 그걸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물론 이 교리에서 깊은 영성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이젠 예전의 자기는 죽고 없으며 자기 안에는 예수님만 살아있다는 신앙은 어찌보면, 그리스도교의 무아사상이죠. 저는 바오로 사도가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죽었기 때문에, 이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를 사는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신학을 대단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었던 바오로가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입니다. 난 이런 논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죄의식이 없는 21세기 현대인에게 굳이 ‘너는 죄인이고,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 가’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원죄론으로 죄의식을 강조하는 것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창조하시면서 줄곧 ‘보시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이런 걸 원복(原福, Original Blessing)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래 괜찮게 태어난 존재잖아요.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 복된 존재로 보고 우리를 복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제거하는데 앞장섰지요. 병을 고쳐주고, 마귀도 빼내주고 말입니다. 그분은 너는 원래 죄인이니 죄인으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워낙 죄를 많이 지어서 내가 너 대신 죽을 거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김경윤. 사진=한상봉

비록 지옥이라도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살아가 보자

더 이상 우리 죄를 가지고 종교를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잘못한 사람은 처벌받았으면 좋겠어요. 잘못했다고 말하고 새롭게 갱신되면 좋겠어요. 인간이 아무리 후져도 남에게 제가 받을 벌을 넘길 정도는 아니잖아요. 저는 긍정성 위에 긍정성을 극대화 하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예수님의 원 포인트 레슨도 인간의 긍정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거지같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살아가자. 여기가 비록 지옥이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끼리라도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살아가 보자. 그걸 한번 해보자. 여기가 비록 감옥일지라도 우리는 잔치를 벌여보자. 여기가 비록 착취의 장소라도 우리 한 번 나눠보자.

여기가 비록 고리대금업이 횡행한 곳이라도 우리 돈을 꿔주고 받을 생각을 하지 말자. 여기가 비록 시간당 얼마 주는 곳이라도 우리는 적어도 시간당 얼마 주지 말고 여덟 시간 일하건 세 시간 일하건 한 시간 일하건 한 데나리온을 주는 사람처럼 그렇게 분배를 해 보자. 여기가 비록 여성과 아이들이 인권적으로 위태로운 곳이라 해도 여성과 아이들을 같은 동료로 평등하게 대접해 보자. 약간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라고 해도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런 나라를 실험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부처님이 깨달은 무아의 경지가 비교적 관념적 경지라면, 예수님은 ‘하느님은 조건부 하느님이 아니라 어떤 조건도 필요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깨달음을 앞당겨 사는 운동을 시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기존 유대교에서 얻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처럼 무조건의 사랑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잔치에 많은 사람이 초대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전복적이어서’ 그 위험성을 감지한 지배자들이 그분을 잡아 죽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분이 죽고 그래서 무조건적 사랑의 행위가 멈추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어요.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아예 A.D. 73년 이후 이스라엘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떠올랐던 것은 아닐까, 그때가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비록 스승은 떠났지만 스승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면 우리도 무조건적 사랑을 실현해보자 나서지 않았을까요. 이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기도하면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언어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현해 간 것은 아닐까요. 

 

A Mother-Son Sleepover By Lauren Apfel

여자들이여, 파업을 하자

저는 다른 것은 다 사라져도 원 포인트 레슨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친구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었던 이 무조건적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사랑의 방도를 찾아가는 게 교회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뭐든지 규모가 커지고 시스템이 되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예를 들어, 학교 아이들한테 100 정도 투자된다고 한다면, 건물 유지하는데 50, 교사들 월급 주는 데 30 들어가면 정작 학생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결국 학교는 아이들 공부하는 데가 아니라, 아이들을 볼모로 삼아 저들끼리 먹고 사는 곳이 됩니다.

교회라 해서 다를까요? 교회의 성직자들이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실제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한테 100을 다 주어도 모자란데 90은 떼어먹고 10정도 떼어주면서 ‘우리가 굉장히 좋은 일을 하고 있어’ 하며 자랑하는 건 아닌가요?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부터 교회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조직론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보통 뭔가 새로 조직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먼저 재정확보가 되어야 해요. 그럼 돈을 모을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부자들이 헌금을 내면 그걸로 센터를 만들고, 사업을 벌여 또다시 돈을 만들어야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출발부터 거지로 시작했어요. 부자들한테 네 돈을 다 들고 나한테 와, 내가 그걸로 좋은 일 할게, 하지 않았어요. 네가 가진 것 다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거지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한테 들어가면 다 거지가 되는 거죠.

게다가 좀 더 괜찮은 조직을 만들려면 좀 똘똘한 사람들을 모아서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나 공자의 제자들 보세요. 대단한 사람들이죠. 소크라테스가 유명해 진 것은 똘똘한 제자였던 플라톤 덕이잖아요. 예수님도 조직을 하려거든 웬만한 사람들을 뽑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남자 제자들은 다 함량미달이었습니다. 왜 그런 이들을 열두 명씩이나 모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상한 짓거리만 합니다. 스승이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는데, 내가 먼저다 네가 먼저다 다투기만 했어요. 그나마 나은 사람들은 다 여자들이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밑을 끝까지 지킨 것도 여자들이었고, 무덤에 마지막까지 찾아간 것도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는 여자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교회가 훨씬 나아질 것 같아요. 그런데도 나중에 교회 안에서 떡고물 떼어먹은 것은 다 남자들이었잖아요.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여자들이 파업을 하는 겁니다.

여자들이 교회에 안 가면, 1년도 안 가서 교회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문을 여는 겁니다. 여자들이 주인이 되는 교회 같은 것 말입니다. 이젠 마리아의 후손들이 21세기 교회를 끌고 가면 좋겠어요. 어쨌든 교회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제도를 만들어 놨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를 했고, 첫째가 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죠. 복음서 여기저기서 위계질서의 전복을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친구론

어느 한 집을 센터 삼아 그곳으로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는 방식을 택하면 그곳이 성역화 되거나 재산이나 지분이 모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쓰신 조직론입니다. 근처에 정사를 만들어 귀족들이 거기에 기부하게 한 다음에 스님들이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시외곽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아무런 시스템이나 건물도 안 만들어놓고 계속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상황이 긴박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걸 만들면 나타나기 마련인 위험성 때문일 수도 있어요.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반면교사가 된 셈입니다. 성전을 짓고, 성전을 중심으로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면, 하느님 앞으로 나가는 데도 일층, 이층, 삼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자신도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던 분 같습니다. 그분은 ‘나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만났듯이 너희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너희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내가 했던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너희에게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내가 옛날에는 친구라 하지 않았지만 이제 내가 패를 너희에게 다 보여주었으니 너희가 나를 잘 알지 않냐, 그러니 너희를 지금부터 친구라 부르겠다고 합니다.

이 예수님의 ‘친구론’은 수직 관계를 전복시켜서 첫째가 꼴찌가 되게 하는 조직론입니다. 예수님은 부유하고 힘 있고 똑똑한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들이십니다. 이들과 수평적 조직을 유지하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그런 실천을 해낼 때 그것이야말로 교회입니다. 

 

by Maria Laughlin

예수에게도 스승이 있었다

나는 가톨릭이야, 나는 개신교야, 나는 불교야, 라고 말하지 않아도 깨달은 만큼 세상 속에 녹아 들어가서 실천을 해나가는 종교가 제법 괜찮은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리스도인은 ‘저 친구 괜찮지 않냐, 저 친구랑 술 한 잔 하면 좋지 않을까, 저 친구랑 사귀면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저 친구랑 살면 즐거울 것 같고, 저 친구랑 살면 내가 행복해질 것 같고, 저 친구라면 공짜로 돈을 꿔 줘도 사기 칠 것 같지 않고 안 받아도 될 것 같은 그런 거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스물아홉 먹을 때까지 꽤 많은 인생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수님에게 12명의 제자가 상징적으로 있었듯이,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스승이 상징적으로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절반 이상이 여자라는데 저는 목숨을 겁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복음서에서 발견하는 그런 예수님의 신학이 나올 수 없어요.

예수님의 정신을 구성해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였을 겁니다. 성모 마리아 같은 엄마 공동체, 이모 공동체, 아줌마 공동체 속에서 예수님이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예수님이 된 것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서에는 여자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야곱의 우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혈루병 앓는 여자를 고쳐주고, 간음한 여인, 향유를 부은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 같은 것이죠. 

예수님에게 12명의 스승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뻥이지만, 시로페니키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과연 압권입니다.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방에 적들이 많이 생겨서 숨어지내는데, 어느 날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딸에게 귀신이 들렸으니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매정하게도 딱 잘라 거절합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려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매사에 급진적이었던 예수님이 ‘민족문제’에 딱 걸린 셈입니다. 이방인을 ‘개’라고 본 거죠. 이 여인은 모욕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말하죠.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자신을 모욕한 이를 ‘주님’이라 부르며 칭찬으로 돌려주는 여인입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서라면 개라도 되겠다는 거죠. 그러니 빵을 달라는 거죠.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딸을 고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 여인이었던 겁니다. 사랑만이 인종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든 사람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이었다면, 그녀가 예수님에겐 스승이었던 셈입니다. 배울 줄 아는 예수님과 사랑할 줄 아는 여인은 참 아름답습니다.                                    

※ 이 글은 지난 9월 16일에 열렸던 가톨릭일꾼 강습회에서 행한 김경윤의 <제 정신으로 읽는 예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 10-11월호(통권 15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김경윤
인문학 작가, 자유청소년도서관 관장. 지은 책으로는 <철학의 쓸모>, <장자, 아파트 경비원이 되다>, <논어-참된 인간의 길을 묻다>, <제정신으로 읽는 예수>,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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