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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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숨길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09.1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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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 대문자로 쓰여진 글자, INRI는 처형당하는 사람의 머리 위에 달아놓아야 한다고 빌라도가 공표했던 일종의 비문이다. 그 뜻은 "나자렛의 예수, 유다인의 왕"(요한 19,19)이다. 그리고 이 글자는 십자가 아래에서 태어난 보편적인 공동체를 상징하게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어 매달린 몸은 손과 발, 세 군데의 상처, 그리고 한 병사의 창에 찔려 생겨난 옆구리의 상처까지 모두 못 자국을 달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창에 찔렸을 때,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요한 19,34). 즈카리야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즈카 12,10). 이 구절은 야훼가 예루살렘을 그 적으로부터 구해냈을 때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또한 예루살렘이 다른 신들과 모든 죄로 더렵혀지고 야훼가 해방시킬 때에도 발견되는 구절이다:

“나는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을 부어주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즈카 12,10).

"그날에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죄와 부정을 씻어 줄 샘이 터질 것이다.“(즈카 13,1).

나무에 못 박힌 희생자를 찌르고 그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하여 그를 바라본다는 이 간결한 표현은 단순히 처형의 순간, 죽음을 선포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실재를 신학적으로 묘사하였다:

“피와 물이 터져 나왔다. 유다인들은 희생자들의 피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요한 사도가 시적으로 표현하고 후에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열려진 가슴으로부터 세례와 성찬례의 성사, 물과 피가 솟아나왔다. 십자가로부터, 용서와 새로운 생명이 우리를 위하여 솟아나왔다.

예수님의 열려진 가슴은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용솟음치게 했던 비밀의 그리고 신비스럽고 강력한 사랑을 발견하라고 초대한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은 그들의 기억과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었다; 다른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어떤 말도, 어떤 행위도 심지어 어떤 침묵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었다. 십자가 위의 그분의 열려진 가슴으로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대한 헌신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앙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지적인 생각들에 현혹당하지 말자.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자.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닮아가도록 맡기자.

 

이렇게 십자가 위에 매달린 주님은 비록 비인간적으로 잡아당겨지고 못 박혔지만,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눈앞에서 하늘을 떠다니는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집회서에서 표현되는 지혜의 찬가를 환기시킨다:

“한 처음 세기가 시작하기 전에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셨고 나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으리라. 나는 거룩한 천막 안에서 그분을 섬겼으며 이렇게 시온에 자리 잡았다. 그분께서는 이처럼 사랑받는 도성에서 나를 쉬게 하셨다. 나의 권세는 예루살렘에 있다. 나는 영광스러운 백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나의 상속을 주님의 몫 안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헤르몬 산에 서 있는 삼나무처럼 자랐다. 나는 엔 게디의 야자나무처럼 예리코의 장미처럼 평원의 싱싱한 올리브 나무처럼 플라타너스처럼 자랐다. 내가 테레빈 나무처럼 가지를 사방에 뻗으니 그 가지는 찬란하고 우아하다. 내가 친절을 포도 순처럼 틔우니 나의 꽃은 영광스럽고 풍성한 열매가 된다.

나에게 오너라, 나를 원하는 이들아.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나를 기억함은 꿀보다 달고 나를 차지함은 꿀송이 보다 달다. 나를 먹는 이들은 더욱 배고프고 나를 마시는 이들은 더욱 목마르리라. 나에게 순종하는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나와 함께 일하는 이들은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 24,9-22)

위의 구절에 나오는 나무의 형상은 창세기로부터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장식되고 표현되어 왔다. 잠언서는 이렇게 말한다: “의로운 이의 결실은 생명의 나무”(잠언 11,30)이다. 그리고 예언자 에제키엘은 온세상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다가올 존재를 묘사하려고 나무들의 형상을 사용한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에제 17,22-24)

십자가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새로운 생명나무이다. 이제 다시 한 번, 낙원이 열리고 부활의 약속으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경 전체가 낙원에서 시작되고 낙원에서 끝나는데, 그동안 우리는 나무아래 서서 그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묵시록은 아직도 실현되어야 할 약속인 꿈으로 끝난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1-5)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서 생명의 풍부함을, 우리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바라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폭력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증언이요, 역설적으로 불의와 죽음에 대한 비폭력 사랑의 힘을 침묵 중에 선언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을 것이다. 하느님은 죽었다. 하느님은 고통받고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갖고 죽는다. 그러나 우리가 죽이려고 할 때에도, 우리의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이시고 우리를 죽음에 내버려두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우리 눈앞에서 언제나 거울처럼 우리가 “찌른 분을 바라보도록” 존재하고 계실 것이다.

성 금요일 이후로 십자가와 그 위에 못 박히신 존재는 신앙의 기반을 놓는다. 그것은 사랑, 용서, 정의, 그리고 자비가 죽음, 악, 미움과 살인보다 강하며, 그리고 모든 것, 심지어 고통과 죽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명의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 안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초기 교회 시기에 순교자 유스티노는 이렇게 썼다:

“세상의 일이 십자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고려해 보자. 바다는 돛대가 곧추 서 있지 않으면 건너갈 수 없다. 십자가가 없다면 경작을 할 수 없고, 십자모양의 도구가 없다면 땅을 파는 사람들이나 기계공이 자기들의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은 그들의 곧은 자세와 팔을 뻗치는 방식에 의하여 동물들과 다르다. 우리가 숨을 쉬는 코는 이마까지 곧바로 연결되는 적절한 각도에 놓여 있으며, 예언자의 말을 실현한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는 우리 얼굴 앞에 계시는 숨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악은 나무에 못 박힌 존재에 의하여 극복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지혜는 생명의 나무를 바라보고,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주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이 사랑이다.

모든 존재,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악에, 영원한 죽음에 굴복하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요안 비안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를, 하느님께 일치하기를,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기를, 하느님을 위하여 살기를! 아!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그리고 죽음도!.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모습을 보고 햇빛도 그 밝음을 잃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졌습니다,
부당하게 나무위에서 고통받고
사악한 이들에 의하여 모욕을 받은
창조주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서...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의 십자가 나무는
믿는 이들에게 생명의 나무가 됩니다.
십자가에 의하여, 죽음의 힘이 땅에 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로 죽어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께 외칩니다:
주님, 온 우주의 힘이여, 당신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은 지상 한 가운데에서 구원의 작업을 수행하십니다,
당신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가장 순수한 팔을 뻗치십니다,
울부짖는 모든 백성들을 한데 모으십니다,
당신께 영광을 드립니다, 오 주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 아멘."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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