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요약판, 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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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요약판, 주님의 기도
  • 한상봉
  • 승인 2018.09.0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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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기도>와 <예수의 독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 6,9-13)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기도’만큼 친숙한 것도 없다. 그렇지만 너무 익숙해서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그만큼 모르는 사람도 많다. 습관적인 음송이 주는 함정이다. ‘주님의 기도’를 알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분의 갈망과 절박한 심경을 확인하는 복음의 요약본이 ‘주님의 기도’이다. 그래서 본래 이 기도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바칠 수 있는 특권적 기도였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복음 6장 9-13절과 루카복음서 11장 2-4절, 디다케 8장 2-3절에 조금씩 다르게 수록되어 있다. 마태오복음에선 이 기도에 앞서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6,7-8) 당시 바리사이들이 바치던 유대교의 기도문이 하느님께 대한 찬사를 길게 늘어놓는 장황한 내용이었다면,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다는 이 기도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다.

 

by Maria Laughlin

마태오에 수록된 ‘주님의 기도’ 도입부는 “아버지!” 하고 짧고 간절하게 호명한다. 권력에서 배제되어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들은 하느님을 장황하게 칭송할 겨를이 없다. 그저 ‘아버지!’하고 짧게 부를 뿐이다. 예수 주변에는 죄인들, 즉 거지와 창녀와 세리들이 모여 있었고, 그분은 그들과 식탁에 앉았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킬 여유가 없어서 죄인이 된 사람들이었고, 회당에서도 배제된 가난한 이들이었다.

결국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런 죄인들을 부르는 나라이다. 승자들이 아니라 추방당한 자의 시선으로 발음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이고, 사실상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래서 이 기도에는 ‘감사의 기도’가 없다. 지금 이곳에서 고난 받는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조차 찬양할 힘이 없다. 하느님께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할만한 삶이 없기 때문이다.

땅에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절규하며 기다린다. 유대교 당국의 추상적인 거창한 감사와 달리, 예수는 그들과 더불어 삶의 질곡 속에서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린다. 당시 로마황제가 파견한 총독들과 헤로데 정부는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이고, 무분별한 부역사업을 강행해 왔다. 게다가 전염병과 기근, 기타 자연재해 등 만성적이고 주기적인 고난은 촌락을 해체시킬 만 했다. 그래서, 헤로데가 죽은 기원전 4년뿐 아니라 수없이 민중봉기가 발생했으나 로마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대중화 하면서 회당으로 중심으로 촌락을 통합해 나갔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 ‘죄’ 때문에 고통 받는 거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윽박질렀다. 그 자리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죄인들 곁에 친구로 앉아 있었던 사건이 ‘강생사건’이다. 그들처럼 억울하고 매 맞고 고난 가운데 노예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앞 소절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공평과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에 대한 평판이다. 그 평판은 하느님의 나라가 와야 거룩히 빛날 수 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땅을 위한 영원한 모델이지, 우리가 사는 땅의 미래 운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나라의 성격이 자주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언어 사용 때문이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5번 언급하고 있지만, ‘하늘나라’는 31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현실을 뜻한다. 마태오복음에서 이 구절이 그 사실을 쉽게 확인해 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 19,23-24)

 

by Maria Laughlin

“불이 붙어서 타고 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었을 때, 모세가 들은 말은 간단했다. 노예들을 해방하라는 것이었다. 노예가 없이 만인이 평등평화를 누리는 세상이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며, 그분의 뜻이며, 그분의 이름이 드러내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지금여기, 이 땅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이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전쟁과 폭력, 불의와 억압의 시간이 끝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결국 세상(cosmos)이 아니라 ‘시대(aion)의 종말’을 기다리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부패한 세상을 청소하시고, 평화가 찾아오리라 믿는다.

“그분께서 수많은 백성 사이의 시비를 가리시고
멀리 떨어진 강한 민족들의 잘잘못을 밝혀 주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
(미카 4,3-4)

세례자 요한은 미래에 올 하느님 나라가 이제 임박했다고 선포했으나, 예수는 그 나라에 이미 여기에 현존한다고 말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려왔지만, 예수님은 정작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셨다고 전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개입을 원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협력을 기다리신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이미 그 나라를 살아냄으로써 그 왕국을 세우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는 이곳에 있다는 설파하신다.

 

by Maria Laughlin

하느님 나라, 구체적 일상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빚진 이를 저희도 용서/탕감하였듯이 저희 잘못/빚을 용서/탕감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주님의 기도’에서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고, 내 재산과 건강을 지켜달라고 청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먹을 끼니만이라도 해결해 달라고 청한다. 복음서마다 약간 차이는 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루카복음 공동체에서는 ‘날마다’ 매일매일 빵을 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서와 디다케의 상황은 ‘지금 당장’ 먹을 양식을 달라고 간청한다. 이를 두고 <예수의 독설>(김진호, 삼인, 2008)에서는 말기 암환자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말기 환자들은 “날마다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당장 굶주리고 있는 사람은 ‘내일’을 의미가 없다. 내일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디다케의 기도에는 ‘간절한 종말론’이 배어 있다. 그 나라가 하루속히 와서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갈망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거듭 새삼 전하는 이야기는 ‘오병이어’처럼 군중을 먹이신 기적이다. 일을 구하지 못하고 배고픈 갈릴래아의 군중들은 항시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예수님의 사명은 사실 전적으로 그들의 상황에 응답하는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굶주림만큼 당시 가난한 이들을 괴롭힌 것은 ‘부채/빚’이었다. 가난한 이들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부자들에게 빚을 질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대부분 상환능력이 없기 마련이다. 오늘 없던 돈이 내일 생기겠는가? 게다가 터무니 없이 높은 이자 때문에 더욱 고통받았다. 이 때문에 땅을 저당 잡히고, 결국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 교회에서 가르치는 ‘전례용 주님의 기도’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사실상 “저희에게 빚진 이를 저희가 탕감해주었듯이, 저희가 지은 빚을 당신께서도 탕감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무력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적극적인 요청이라면, 빚 탕감은 소극적인 요청이다. 그래서 모세오경[토라]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적 대부에는 이자를 금지하지 않지만, 생계와 끼니를 위해 돈을 빌리는 이들에게 이자를 받는 것은 금지한다. 지나친 이자와 저당은 부채를 갚지 못한 이들을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며, 토라는 이 노예조차 안식년에는 해방시키라고 규정한다.

“너희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너희 곁에서 허덕이면, 너희는 그를 거들어 주어야 한다. 그도 이방인이나 거류민처럼 너희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에게서 이자나 이익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 형제가 너희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자를 받으려고 그에게 돈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되고, 이득을 보려고 그에게 양식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된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5,35-38)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주라’는 ‘주님의 기도’의 요청을 우리는 ‘죄에 대한 은유’로 읽고 싶어 하지만, 성경전통은 문자 그대로 읽으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굶지 않는 오늘과 부채 없는 내일을 희망한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남의 죄를 용서하고, 내 죄를 용서받는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라는 ‘정치적 사랑’에 대한 요청으로 나아간다.

마태오복음은 빚과 죄가 깊은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베드로가 묻는 장면(18,21-22)에 이어서, 자신은 큰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을 감옥에 넣어버리는 매정한 종의 이야기(18,23-35)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빚”과 “죄” 모두를 읽어내야 한다. 성경전통은 빚이 너무나 큰 불평등을 불러오기 때문에 죄많은 상황[사회악]을 낳는다고 가르친다.

 

by Maria Laughlin

평화를 원하거든 폭력을 버리고 진리를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로마제국 식민통치와 유대의 종교-정치적 지배층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 사이에서 메시아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대에 쓰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한 시대를 끝장내고 싶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따르면, “로마인의 친구”이며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로데왕이 죽었을 때 유대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에서만 2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수도였던 세포리스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늘 로마의 지배에 대항해 무력투쟁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가장 비참한 결과가 기원후 70년 전후에 발생한 유대전쟁이었고,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거나 흩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존 도미니코 크로산은 <가장 위대한 기도>에서 ‘주님의 기도’는 “로마의 폭력적인 지배에 저항해서 폭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으로 우리를 이끌지 마시고, 그런 악한 행동으로부터, 또는 그런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마르 14,37-38)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베드로는 방어적인 칼(마르 14,17)을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며 방어적인 칼을 거부했다. 제자들을 파송하는 Q판본에서는 예수님이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마태 10,9)고 명령한다. 최소한의 방어 무기도 지니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Q자료보다 10년 혹은 20년 후에 기록된 마르코복음에서는 ‘지팡이 지참’은 허락한다. 그리고 더 늦게 기록된 루카복음에서는 막판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묻고,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25,35-36)고 말한다.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예수님의 발언이 기록된 것은 훗날 그 제자들에게 개인적 방어수단마저 포기하라는 예수의 발언이 너무 버거웠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려면,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지금여기에서 살기 시작해야 하며, 그게 곧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높이는 일이라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그 나라는 공평하게 빵이 나누어지고, 부채 때문에 종살이하는 사람이 없으며, 더 이상 폭력이 정당화 되지 않는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빚어내는 하느님 나라만을 추구하고, 폭력에 기대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며, 이미 유혹에 빠진 자들을 그 악/악한에게서 구출해 달라고 청한다.

[참고서적]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 8-9월호(통권 14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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