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령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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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령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8.08.2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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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서 사악한 무리 중의 하나라는 평판을 받았으므로, 자신이 항상 세상일에 말려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들이 된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조차 그분과 결합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그분은 우리가 물질재화를 좇을 것이라고 알았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조차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일정한 양의 재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히브리 노예들은 에집트에서 나올 때, 에집트인들의 소유물, 금과 은을 들고 나왔다. 오늘날까지도 정치권력이 박해를 통해 재물을 빼앗을 때까지, 또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참회하고 우리자신을 비우며, 우리자신을 거부하고 형제들을 섬기며 그분을 따를 때까지 교회의 재산을 늘려간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형제들끼리 싸운다. 독일인과 이태리인이 싸우고,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이 싸우고, 가톨릭과 개신교와 정교회가 서로 싸우고 있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면서도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는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좋다. 나를 알아듣기 전까지는 돈과 지갑과 칼을 가져라. 그러나 너희는 부활한 주님, 너희들의 예수, 너희들의 스승과 인격적인 만남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토마스,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경험했던 것처럼. “나는 너희들이 나를 부인하고 있을 때에도 너희들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아버지의 고유한 사랑을 받는 너희들은 이 사실을 알아듣기 위하여 성령과 만나야 한다. 너희들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문제는 너희들의 개인적인 양심, 개인적인 회심에 달려있다. 청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나에게 ‘하느님 눈에는 천년이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이 참으로 위안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이제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우리는 거의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재물과 무기로 하느님과 국가를 똑같이 공평하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에 교황청 베드로좌에서 추기경단에게서 예수님의 치유하는 손길과 함께 “칼을 치우라.”는 명료한 선언이 들리기를 기도하고 희망한다.

사도들은 칼을 들지 않았지만, 대신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처음엔 주님을 다시 뵐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은 이 세계가 아니라는 것, 이 세계는 그분의 나라를 시험하는 자리이고, 노력하는 장소라는 것, 베네딕도 성인이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지상의 왕국이 올 것인지 여전히 그분께 묻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빛을 비춘 후, 그들은 순교로 달려갔고, 십자가를 끌어안았으며, 점점 더 이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는 교회가 이런 선언을 하기를, 우리가 명료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용감한 이런 선언을 주교들에게서 듣기를 온 마음을 다해 갈망한다. 우리는 여전히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도들처럼 여전히 칼을 든 채 흑인 형제들과 베트남 사람들 안에서 계신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세세대대로 응답을 받아왔다. 사도들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라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계명은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데까지 지켜야 한다. 구약과 신약으로 우리 모두를 한데 결합시켜주는 사랑의 계명은 마침내 베드로에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 병역거부로 순교한 독일의 프란츠 야거슈테터Franz Jagerstatter에게도 들렸다. 그리고 수세기동안 그 삶의 역사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들렸다. 우리의 하느님은 숨어계시는 하느님이고, 그러한 이야기들 역시 성인들의 삶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베트남의 테오판 베나르Theophanes Venard 성인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그는 참수되기 전에 사형집행자가 대가로 받는 그의 옷이 피로 얼룩지지 않도록 먼저 옷을 벗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 그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모릅니다.”라고 말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적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우리는 또한 아프리카와 그 착취의 역사를 읽을 때에 우간다의 가톨릭과 개신교 순교자들을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칼을 드는 모든 곳에서 순교하고 계신다. 그분은 세상 종말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마지막까지 그분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 가톨릭 평화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나에게 명료하고 이론이 정연하며 논리적인 평화주의 강령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운동이 33년 지날 때까지 내가 그 글을 쓰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령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계속 싸울 것이다. 그리고 자주 가장 고결한 동기를 갖고, 다른 이들의 정의를 위하여, 또는 현재와 미래의 공격에 대비하여 자기방어적인 전쟁들을 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앞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막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자유’처럼 모호하고도 어마어마한 개념 같은 고귀한 목적에 의해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으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겸손하게 (사실상 게으르거나 귀찮아서)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전문가들에게 결정을 기꺼이 맡겨버린다.

종교적 회심이 없어도 홀로 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부인과 아이들과 농장을 떠나는 프란츠 야거슈테터 같은 사람들은 적지만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프란츠 야거슈테터가 말했듯이, 그를 움직인 힘은 어떤 수소폭탄보다 더 강력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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