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신앙생활은 복음의 적"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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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신앙생활은 복음의 적" -빈센트 반 고흐
  • 한상봉
  • 승인 2018.08.2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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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23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한 현장 지향적 신앙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삶에서도 읽어 낼 수 있다. 발터 니그는 <빈센트 반 고흐, 태양을 보다>(분도출판사, 2011)에서 “고흐는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하느님을 끝없이 갈망하는 사람”으로, 애초부터 광산촌에 살며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한 영혼이라고 했다.

고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다가, 고전어 교사였던 멘데스 다 코스타에게 물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승에서 짊어져야 할 운명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을 원하는 저 같은 사람이 이런 끔찍한 공부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슬픔과 죽음의 대지, 보리나주

그는 결국 브뤼셀에 있는 선교학교에서 학문적 지식보다 실무를 먼저 배우고, 동정심에 이끌려 보리나주의 탄광촌으로 갔다. 고흐는 “이곳은 어둡고 음울한 곳이다. 첫눈에 이곳은 모든 것이 슬프고 죽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동자 대부분은 열병에 걸려 여위고 창백하다. 수척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생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여자들은 창백하고 시들었다.”고 보리나주에 대한 첫 인상기를 적었다.

온 삶을 어두운 땅 밑에서 보내는 그들은 일요일이 아니면 햇볕을 볼 수 없었다. 어린이들도 작은 수레를 옮기는 일을 하고, 눈먼 말도 수레를 끌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교회 전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함을 추구하는 그의 의지에 따라 아주 간소한 형태로 전하고 싶었다.

광부들은 처음에 이 빨강 머리 젊은이를 조롱했으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고흐를 이내 받아들였다. 그가 마련한 모임에서는 교회에서 흔히 느껴지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냉혹한 거리가 없었다. 그는 광부들에게 회개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무섭게 진노하며 광부들을 왜소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사람을 위협하는 심판의 말을 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 힘겨워보였다.

 

광부, 가난한 그리스도

고흐는 가난했던 그리스도를 기억하듯이, 이윽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했다. 자신도 굴뚝 청소부처럼 온몸에 검댕 칠을 했고, 광부들과 똑같은 가혹한 운명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가진 돈과 옷을 그들에게 나눠 주고, 군복 상의와 포장용 천으로 직접 지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세 들어 살던 빵집을 나와 초라한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길바닥에서 자주 잠을 잤으며, 마른 빵과 시럽을 먹으며 광부들과 똑같이 비참한 형편으로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런 고흐의 모습을 두고 “그것은 미친 사람의 행동이었는가?” 묻는 사람이 있었지만, 고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도 미친 사람이었다.”라고 답했다. 그의 내면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갱내에서 사고가 발생하자, 의사도 포기한 중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목숨을 살렸으며, 파업이 일어나자 노동자 편에 섰다. 고흐는 관리자들을 찾아가 불쌍한 광부들의 요구를 지지했으며, 관리자들은 선교사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면서 그를 밖으로 쫓아냈지만, 광부들은 그를 신뢰했다. 고흐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어 주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는 진지하고 깊은 마음은 절대적인 힘으로, 압도적인 마력으로 감옥 문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죽음 속에 머무른다. 하지만 교감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생명이 일어난다.”

그런데 고흐를 선교사로 채용한 브뤼셀 선교위원회는 고흐가 움막에서 예배를 드리고 남루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으며, 결국 고흐가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면직시켰다. 이 경험을 통해 고흐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복음의 적”임을 깨달았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가 낳은 ‘적당한 온도의 그리스도교’가 드러내는 권태가 아니라, 관습을 완전히 뛰어넘는 종교적 열기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한 성자들의 초상

실제로 고흐가 화가의 길을 걷고 나서 남긴 많은 작품 가운데는 특별한 시선이 느껴진다. 고흐는 잘 팔릴 수 있는 ‘성자’의 그림을 그리라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거절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림에 담았다.

남루한 환경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광부와 농부들, 우체부, 매춘부였던 시엔과 그녀의 딸 마리아.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호롱불 아래서 소박한 밥상 앞에 둘러앉은 가족을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마치 ‘성만찬’ 같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교회당들은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도 마을의 작은 집 창문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교회당만 불이 꺼져 있다. <오베르성당>도 마찬가지다. 고흐가 경험한 교회는 가르침과 행동이 서로 다른 곳이었다. 그래서 고흐가 그린 교회당은 성령의 불이 꺼져 있는 캄캄한 곳으로 묘사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가 은총보다 법을, 그리스도보다는 교회를, 그리고 하느님 말씀보다는 교황에 대하여 더 많은 말을 할 때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적었다. 본당 사제가 강론을 하면서 “절제에 관해 열 번 말하고 사랑이나 정의에 관해서는 두세 번에 그칠 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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