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분을 만나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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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분을 만나서 다행이다
  • 한상봉
  • 승인 2018.07.1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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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살이공동체 20주년에 붙이는 글

[한상봉 칼럼] 

예수살이공동체.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뜻일 텐데, 적어도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일 텐데, 이런 공동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가 예수님을 따라 살지 못하니까, 마음 맞는 이들끼리 모여서 '교회'를 하자는 게 ‘예수살이공동체’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대조사회, 대안사회가 교회라고 성서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말했다. 고대교회 교부들은 “이승에서 낯선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이승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하는 소리를 들으면 신앙인으로서 일단 성공한 셈이다. 자본주의의 늪에서 정갈한 섬처럼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게 예수살이공동체의 이상일 텐데, 우리는 때로 실패하고 어쩌다 성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도 ‘삶’도 ‘공동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따금 예수님 생각을 하면, 애잔하다. 슬픈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승에서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아프다. 아직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곧은 사랑은 언제나 상처를 동반한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정(Passion)이 그분을 고난(Passion)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세상은 그분을 죽였다. 노예나 역도들에게나 합당한 십자가 죽음,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몸서리치던 방식으로 예수님은 살해당했다. 제자들도 그분을 다 버리고 도망갔고, 몇몇 여인들만이 남아서 슬피 울었다. 그 회한이 남아 있던 이들이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교회’다.

그들은 다시 모여 예수님의 애통한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제 몸으로 받아내기로 작심했다. 그것은 스승을 끝내 잃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려는 안간힘이었다. 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살해당하면 그 다음 사람이 뒤를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순교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말을 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으니, 이제 우리가 또 다른 의미의 그리스도인 이웃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차례이다. 이 순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교회 안에 머물까? 우리 고민의 지점은 늘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예수’는 그만큼 무거운 이름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내심 예수님의 ‘이름’만 갖기로 결정한다. 그분의 삶은 말고 그분의 부활만 얻기로 결심한다.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삶은 생략한 채 곧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고백한다. 비겁한 우리에게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는 항상 삶이기 때문이다.

나고 죽은 것이야 어차피 우리 소관이 아니다. 우리 몫은 ‘그냥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라 믿는 게 속 편하다. 그분을 나의 옹호자로, 나의 뒷배로 세우는 일이다. 이제 그분은 나의 해결사이며, 정말 내가 모지리로 살면 심판하실 분이다. 어쩔 수 없다. 왜? 사실상 ‘나는’ 예수님처럼은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하랴, 예수살이공동체에 호적을 넣었다고 예수님이 우리 얼굴을 알아본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그분이 나에게 ‘나랑 친구 하자’ 하였으나, 내가 그분의 친구가 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인생이 사납게 달겨들어도 혼자가 아니라면 그나마 견딜만 하다. 덜 무섭다. 그래서 우리는 모지리끼리라도 함께 있으려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 아예 이런 말도 남겨 두었지 않았나. “너희가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나 홀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하느님도 세 분이 한 분을 이루시는데, 그분의 백성들도 여럿이 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다. 혼자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기는 쉬워보여도,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서 평화를 이루는 것은 녹록치 않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야, '그래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사랑해야' 간신히 얻는 평화가 공동체를 이룬다. 좀 손해 보는 듯이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게 우정이다. 그래서 공동체는 연옥이고, 천국으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Christ Carrying the Cross

그분을 먼저 만나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에서 복음적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직 그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 관리자로 남은 성직자들에게 사제직은 ‘생계수단’으로 남고, 신자들은 ‘고객’으로 남는다. 교회단체들은 ‘사교클럽’이거나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팬클럽에 머물 위험이 있다.

카일 아이들먼은 <not a fan.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에서 “우리는 예수 팬클럽인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물었다. 아이들먼은 안전한 관중석에 앉아서 축구선수를 응원하는 팬은 많지만, 직접 제가 좋아하는 선수처럼 운동장에 내려가 숨가쁘게 공을 차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걱정한다. 그 선수의 전적과 고향과 가족사항, 생년월일까지 꿰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람의 인간적 고뇌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다는 뜻이다. 팬들은 자신의 욕망에 부응할 때까지만 그 선수를 응원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그림자를 기억하고 조심스레 스승의 뒤를 밟는 사람들이다. 급기야 스승이 마저 하지 못한 과업을 완수하려고 달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전례를 통해 그분을 기념할 뿐 기억하지 않는다. 그분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그분을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분을 위해, 또는 그분처럼 죽어야 한다는 진실은 알지 못한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외면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는 게 옳다. 비겁하고 영리한 신앙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취하고, 불편한 진실은 버리는 신앙이다. 그래서 사실 이건 신앙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봉할 뿐, 그분에게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살이’를 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벌써 말씀하셨다. 예수님, 그분을 만나라고. 어떻게 만날까? 가장 쉬운 방법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참에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에 관해 글도 열심히 썼다. 기도서를 두 권이나 썼다. 이 무모한 여정에서 줄곧 생각한 것은 “기도보다 실천이 우선”이라는 얄팍한 논리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내가 썼던 그 많은 글들은 “내가 걷지 못한 길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고 싶지만, 닮고 싶지만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변호였다. 연습하고 훈련한다면, 하느님에 대해 글을 쓰기는 쉽다. 기도에 대해 글을 쓰기는 쉽다. 그러나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고, 기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허무를 글을 채워나가는 생애란 얼마나 불행한가?

유아세례를 받고서, 내 나이 50대 중반에 이르러 이제 조금씩 기도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늦바람이다. 그분 현존 안에 머무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 내 기도는 짧고 내 삶은 척박하다. 하느님의 그림자는 흐릿하게 보이고, 예수님은 옷깃이 어떤 질감인지 조금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제 와서 기도로 가는 안전한 길을 발견했다.

내 기도가 아직 어리기에, 해묵은 전통에서 그 길목을 발견하고 있다. 그게 미사전례라고 말한다면 진부할까? 새로울 것도 없는 미사가 이토록 새로운 줄 처음 느끼고 있다. 앞줄에 앉아 드리는 미사와 뒷좌석에 앉아 드리는 미사가 달랐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어제 드린 미사와 달랐다. 미사에는 기도와 말씀이 공존한다.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을 향해 노래하고 발음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도로시 데이를 발견했고, 그녀는 비록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비의 일이라고 해도, 일을 중단하고 기도할 줄 알았던 여성이다. 촘촘히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두었고, 매일미사에 참례했다. 그녀가 머물렀던 뉴욕 메리하우스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서 그녀는 매일 아침 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고만 있었을 뿐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도 관성대로 글을 쓰고 편집하고, 강의를 했지만, 날마다 기도하고 미사 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으로 두 해가 지나고 나서야, 문득 가톨릭일꾼운동이 왜 “기도하고 공부하며 일하자”고 말하는지 깨달았다. 그분을 먼저 만나야 한다. 그분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한다. 내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넘겨 드릴 때, 그때에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분 일이 된다. 일의 성패에 매달리지 않고, 만사에서 그분의 얼굴을 발견할 줄 알게 된다. 비참한 실패 안에서도 기뻐할 줄 알게 될 것이다.

 

Saint Cecilia (détail) John William Waterhouse 1895

공부하고 행동하자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불거져 나온다. 예를 들어, 예수살이를 하려는 까닭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본받고 싶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을 아는 만큼 우리는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람의 취향이나 뜻과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결국 사랑이란 미명아래 치러지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일방적 사랑이 신앙의 영역으로 옮겨가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우상을 섬기는 꼴이 된다. 그러니, 공부하자.

예수살이공동체에서는 누누이 ‘예수님의 인간성’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분을 한 몫에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연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면,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인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더욱 공력을 기울여 한다. 예수님의 인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배동교육이나 제자교육에서 한 두 시간 강의를 듣는 것으로는 어림없다. 늘 복음서를 접하고, 학자들이 지난 세기 동안 탐구해 온 신학적 성과를 들추어보고, 스스로 깊은 성찰을 통하여 그분을 생생하게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얼추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분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다면 공부는 절반 이상 끝난 셈이다. 덧붙여 예수님만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곧 참 사람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래서 공부란 끝없는 진리 추구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사람을 알게 되고, 사람을 아는 만큼 하느님 백성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알게 되고, 결국 너무나도 자연스레 그들을 위해 행동하게 된다. 그때 행하는 일은 예전에 내가 하던 행동과 다를 것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여기서 공부란 단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늘려가라는 조언이 아니다.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느끼는 데까지 가자는 것이다.

성모 신심에 관하여

예수살이 공동체는 특별히 안중근 토마스와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존경을 드러내고 있다. 안중근의 경우에는 역사적 인물로서 그다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게 아니라서, 여기서는 성모신심에 관한 이야기만 추가로 다루고자 한다.

예수살이공동체뿐 아니라 가톨릭교회는 거의 자동적으로 성모신심을 강조한다. 한국교회도 성모님께 봉헌되었고, 성모신심 없이 가톨릭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혹시 예수살이공동체에서도 자칫 관습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성모신심을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왜 하필이면 성모 마리아인가? 사실상 예수살이공동체에서 펴낸 자료집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상경지례(上敬之禮)로 다른 성인들보다 더 지극하게 존경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성모님의 수락을 통해 그분의 자궁을 빌어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러니, 성모님 없이 예수님도 없다.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한 그분의 겸손한 수락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까지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성모님을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낳아 드려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서, 예수님과 그분이 아빠라고 부른 하느님을 만난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그뿐인가? 러시아 이콘으로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의 성모’처럼, 그분은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초대하시는 분이다. 중세 사람들은 성모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가장 쉽고 가깝고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콘에서 성모님은 아들에게만 눈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모님과 친밀하게 눈빛을 마주치려면, 반드시 아드님 예수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 해답은 성모님의 이마와 양 어깨에 있는 환한 별에 달려있다. 그 별은 예수의 탄생 전에도, 탄생 때에도, 탄생 후에도 동정이셨던 마리아의 ‘동정성’을 상징한다. 이는 마리아의 존재 깊숙이 스며든 분이 오직 하느님뿐임을 상징한다.

동정성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정 마리아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정복당한 그분만의 온전한 소유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범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와 눈빛을 맞추고 호흡을 나누게 된다.

그래서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에서는 마리아와 예수님이 서로가 서로를 갈망하며 맞물려 있는 뗄 수 없는 관계 안에 머물러 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살이다

예수살이는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양식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뿌리를 내렸는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게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해도 이미 인간적 매력을 뿜고 있다. 그런 분이 정작 하느님 아들이라면, 그분의 딸이라면 더없는 기쁨이겠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우리가 그분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다행스럽고,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축복으로 느끼는 사람은 정말 복이 있다.

그분처럼 똑같이 살지 못해도, 누군가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구원의 경로에 진입했다. 우리의 서툰 발걸음에 동행하시고, 미욱한 우리 마음에도 찾아와 주시는 분, 그런 우리를 ‘벗’이라 부르겠다고 다짐을 주시는 분이 그분이시다. 그분이 먼저 잡아주신 손길을 놓치지 말고, 꼬옥 붙잡고 담대히 가자, 걸어서 하늘까지, 지상에서 천국처럼.

*이 글은 <산위의 마을> 제34호, 예수살이공동체 20주년 특집호 1에 실렸던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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