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한국교회의 정치적 사랑에 관하여
상태바
[교황] 한국교회의 정치적 사랑에 관하여
  • 한상봉
  • 승인 2018.07.16 22: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19

‘정치적 사랑’을 환기시키는 교황

박해가 없어진 오늘날, ‘순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어떠할까? 김홍락 신부에 따르면,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는 <복음 강론(Homilia in Evangelia)>에서 마태오복음 16,24-25를 설명하며 순교를 ‘적색 순교’, ‘백색 순교’, ‘녹색 순교’로 나누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의 자유’ 칙령이 선포된 이후 ‘피의 순교’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다.

전례신학자 마이클 드리스콜은 전례 음악가 마이클 존카스 신부와 공동 집필한 <가톨릭 미사 경본 연구(The Order of Mass: A Roman Missal Study)>에서 히에로니무스 교부의 말을 빌어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철저한 금욕주의를 지켜 나가는 사막의 은수자들처럼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백색 순교”, 그리고 “전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것은 녹색 순교”라고 설명했다.

로메로 대주교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고난을 무릅쓰고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은 이미 ‘녹색 순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복음적 투신을 염두에 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적 사랑’을 환기시켰다. 이를 ‘사랑의 정치적 형태’라고 불러도 좋겠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랑의 정치적 형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성녀 마르타의 집 소성당에서 9월 16일 행한 강론에서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라는 것이다. 본래 정치는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서 ‘자신은 이 선고에 책임이 없다는 듯이’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났던 빌라도처럼 처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는 게 교황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당부했다.

첫 번째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어느 누구도,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지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고 교황은 말한다. 이어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살게 해 주신 이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슬픔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인함과 나약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류 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확실히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는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183항

정의구현사제단, 사랑과 연대의 기풍 세웠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정치적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출범이었다. 1970년대에 유신정권과 교회의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었다.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와 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으며, 지 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다시 감옥에 갇혔다.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에 대처하는 기도회를 이어가면서, 그해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서 참석한 신부 300여 명이 사제단의 결성과 명칭에 합의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천주교 사제들은 이 세미나가 끝난 뒤 원주 원동성당에서 기도회를 갖고 100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 사제단은 사제들의 교회제도상 공인된 단체는 아니었지만 가장 광범위하고 민주적인 사제모임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 당시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 “첫째,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상의 여기, 이곳의 현실 한가운데라는 것, 둘째, 우리가 현실로부터 초연해지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르지도 않거니와 현실이 우리를 초연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는 것, 세째,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바로 여기 이곳의 현실 속에서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가지며 소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해 투쟁하면서 ‘민중의식’이 점점 성장하고, 급기야 냉전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통일운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적어도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차된 이후로는 ‘경제민주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라틴아메리카 교회처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1975년 3월 10일 노동절을 맞이하여 명동성당에서 열린 ‘근로자들의 권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 당시 명동 주임신부였던 김몽은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라는 주제로 강론을 하면서 “근로자는 우리 주님과 가장 가까운 벗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목수일을 하신 노동자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항상 가난하고 성실한 근로자의 교회이며,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교회”라고 선언했다. 한편 이 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역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교회로 가자는 공식적인 결의를 다졌다.

“교회는 억압에 찌든 근로자와 농민을 위하여 중요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민중권익의 압살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모든 악법의 철폐에 교회는 앞장서야 하며 사회의 기초를 흔드는 부정, 부패의 척결에 솔선해야 한다. 잘사는 사람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연장케 해서는 안 된다.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저해하고 있는 근본원인은 민중의 게으름이나 경제성장의 불충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현세의 문제는 빈곤평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빈부불평등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사제단은 이처럼 ‘민주, 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제안하면서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이미 죽은 자를 천당으로 인도하기만 하는 복음이 아니며, 구호물자의 도착을 알리는 자선남비의 복음도 아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다운 모습으로 되살리기 위한 복음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위해 우리 교회가 해방의 요람이 되기 위한 복음이다.”라고 선언했다.

 

강우일 주교

강우일 주교 ‘국가폭력 거부하는 저항의 연대’ 요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 역시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경향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제 우리는 이 사회의 관행이 되고 일상화된 불의와 비리의 고리를 파쇄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진실이 묵살당하고 정의가 억압당할 때 침묵과 외면으로 비켜 가는 무책임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통곡소리가 들릴 때 못 들은 척하고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 벌어질 때 눈을 돌려 못 본 척하고 지나치지 말고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다가가야 한다.”

이어 “국가기관이 개입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화되거나 용납될 수는 없다.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는 국가의 이름으로 고귀한 인권이 무참히 유린당한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몇 십 년이 지난 후 사법부가 무죄라고 판결하고 보상금이 지급된다 하여도 구겨지고 짓밟힌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강우일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자렛 노동자 가정에서 가난하게 사셨고, 수도 예루살렘보다 변방 갈릴래아에서 일하셨던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 이방인과 세리, 죄인과 창녀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겪는 좌절과 실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해방과 위로를 주시려는 것이었다.”고 전하며, 예수는 성전 안에 조용히 머물러 계시지 않고 세상 한복판에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오늘 눈물짓고 고통 받는 이들, 오늘의 가장 작은 이들 곁으로 다가서고 그들의 아픔과 한을 공유해야 한다. 이 가장 작은 이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번영과 성장을 추구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주체가 국가 권력이라고 해도 ‘아니요!’라고 거부하는 저항의 연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 사제들의 정치 참여와 관련해 논란이 많지만,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 33항 ‘정치와 사회적 의무’에서는 “만일 교회 장상의 판단에 따라 교회의 권리와 공동선의 보호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정당이나 노동조합 안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으며, “사실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들은 교회적 친교 안에서 분열의 심각한 위험이 될 수도 있으므로 성직자 신분에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 지침에서 “정치 활동과 사회 조직체들에 직접 개입하는 일을 교회는 사목자들의 어깨에 떠넘길 수 없다는 것을 사제는 명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국 교회 안에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신자들이 있으므로, 자칫 특정 정당이나 노동조합에 사제들이 연루되면 ‘교회적 친교’를 해칠 수 있다고 염려하는 것이지, 넓은 의미에서 사제들의 사회적 관심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제의 정당,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서도 ‘교회의 권리와 공동선의 보호가 요구할 때’는 가능하다는 여지조차 남겨 두었다.

덧붙여 가톨릭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를 비롯한 무수한 교회 문헌은 주교든 사제든 평신도든 한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당연히 해당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시대의 징표를 복음에 비추어 성찰하며, 예언자적 행동에 나설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편 199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공포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14조는 사제가 교구장의 허가 없이 해서는 안 되는 ‘금지 사항’을 명시하고 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사제는 국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을 맡을 수 없으며, 정치적 단체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고, 상행위나 금전 거래, 재산 보증을 할 수 없다. 결국 가톨릭교회의 교회법과 교리서, 교령 등에서 사제들에게 금지한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란 공직, 정당,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일이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