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메로] 평화는 침묵하는 묘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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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평화는 침묵하는 묘지가 아니다
  • 마리 데니스
  • 승인 2018.07.11 0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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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17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충실함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국방부 차관이 … 저에게 말했습니다. … 제가 원한다면 어떤 보호도 해 줄 수 있으며, 방탄차까지도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감사했습니다. … 공손하게 저는 백성들이 겪는 위험을 똑같이 겪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보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백성들은 너무나 불안전한데 제가 그런 안전한 차를 탄다면 반(反) 사목적 모습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신 그에게 검문, 군사작전이 있는 곳에서 많은 피해가 생겨나고 – 혹은 적어도 많은 테러가 발생하는 지역에서 백성들을 보호해달라고 청했습니다."(로메로, 목자의 일기에서)

엘살바도르의 농업 노동자들, 노동조합 조직가들, 혹은 기초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영웅적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기념할 때에, 그들은 매우 창의적인 힘을 가진 기억의 전례를 거행한다. 해방의 섬김에서 살해된 사람들의 이름이 불러지고, 매 이름마다 공동체는 우렁차게 외친다, 함께 있다!

죽은 사람들은 참으로 그 공동체에 현존한다. 삶이 단지 자기-성취 그 이상이라는 그들의 주장 때문만이 아니다. 죽은 사람들은 삶을 신성하게 여기는 그 공간에서 현존하는 것이다. 삶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미스티카로 물들어있어, 단지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창조적인 작업이다.

죽음에 대한 저항

고문, 가난, 혹은 냉소와 절망에 의한 죽음 등, 죽음의 문화 속에서 미스티카를 위한 공간을 계속 열어놓는 과제는 –삶 그 자체와 삶에 대한 희망의 공간을– 저항의 정신에서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에게 속한다. 기억되는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대한 감각이 반문화적이고, 전복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살바도르 사람들이 저항한 것은 죽음이었다. 치료할 수 있는 질병들 때문에 병든 아이들의 죽음, 젊은이들의 희망의 죽음, 죽음의 신들에 대항하여 우뚝 선 사람들의 죽음, 젊은 여성들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팔 때 혹은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 것을 젊은이들이 훔칠 때의 영의 죽음에 대항했다.

죽음은 계속되고,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저항의 정신도 계속 이어진다. 죽음에 대한 저항은 기억에 의하여 계속된다. 백성들은 다시 기억함으로써 저항을 이어가고 그들의 죽은 이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킨다. 죽은 이들 역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가져온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한테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들의 천국, 그들의 영원한 보상은 사랑 안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합니다.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의 힘은 살아남은 사람들한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그리고 백성들의 움직임 안에서 이전보다 더 현존하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합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순교자들의 죽음

기억을 불러내는 일은 창의적인 행위다. 기억으로 제시되는 삶들은 정의와 평화의 주장을 즉각적이고 탈출할 수 없는 초대로 다시 세운다. 순교자들의 정신은 죽음을 거부하는 대담한 힘을 갖고 있다.

매해,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때에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모인다. 순교자들의 증언은 계속 살아있고,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명분에 다시 헌신하도록 그들에 대한 기억은 영감을 불어넣는다.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에 헌신적인 가난한 사람들은 특히 11월 2일, 모든 위령의 날을 통렬하게 기념하는데, 그날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감사의 마음을 갖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하는 죽은 이들을 거룩하게 매장할 수 없었던 수천 가족들에게 11월 2일 이날은 특별한 슬픔의 날이다. 그들은 폭력적으로 끌려가서 실종되고, 고문을 받고 죽음부대에 의하여 소멸된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모든 위령의 날은 그들의 배우자들, 부모들, 혹은 아이들에게 그리스도교식 매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을 알기에, 끔찍한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침묵 중에 우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그들은 “용서”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우리의 적들을 용서하기를!

전쟁기간 동안, 어떤 피난민 캠프에서 대부분이 어린이들인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성찬례를 위하여 제단으로 바뀐 한 식탁 주위에 모여들어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는 순례 중에 있는 백성입니다.” 봉헌에 앞서, 두 아이들과 네 명의 어른들이 6개의 포스터를 들고 제단에 가까이 갔다. 5장의 포스터는 꽃들, 왕관들, 그리고 심장으로 꾸며졌고 그들의 죽은 친척들이나 전쟁 기간 중 죽은 사제들과 수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6번째 포스터에는 꽃이 그려져 있지 않고 말씀만 있었다: “하느님께서 죽은 우리의 적들을 용서하시기를.” 한 나이든 남자가 이 포스터의 의미를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은 사람들 무덤에 꽃을 놓는 대신 이 포스터들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은 친척들의 이름들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므로, 꽃은 없지만 우리 적들의 이름들도 제단 위에 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들이 우리를 죽여도,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 편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살바도르 순교자들의 정신은 역사 속에 그리고 미스티카의 가슴 속에 깊이 현존한다. 로메로에 대한 기억은 미스티카의 중심 부분이다. 오스카 로메로의 이름이 불러질 때에 사람들의 함께 있다! 라는 외침이 없는 죽은 이들의 예식은 엘살바도르에 없다. 순교한 로메로의 이름이 이렇게 불러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죽은 이들의 현존 예식은 비극적으로 중앙아메리카의 전통이다. 그러나 로메로는 그 자신에 대하여 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이 살바도르 백성들 사이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깜짝 선물이었다.

죽음은 정치를 초월한다

오스카 로메로는 죽기 얼마 전에 한 저널리스트에게 어떻게 그런 거침없는 주장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러한 주장은 고양된 자아를 지닌 지도자의 자세이든가 아니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우 깊게 일치하고 있어서 단지 사람들이 그에 대한 기억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꺼질 수 없는 성령이 그들을 과거와 지금, 어둡고도 빛나는 길로 불렀다고 여기는 사람의 자세다.

우상을 거부하고 생명의 하느님을 신뢰하는 백성들에 대한 로메로의 믿음은 엘살바도르의 전쟁을 넘고, 그의 삶을 넘고, 그가 죽은 후 12년 만에 인준된 평화 협정을 넘은 그 이상이었다. 로메로는 정의를 가진 평화를 추구했다. 엄마들이 이질로 인해 탈수 상태로 죽어가는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약을 살 수 없었기에 작은 관을 들고 묘지로 갈 필요가 없는 그런 시대를 추구했다. 로메로는 말했다, “평화는 침묵하는 묘지가 아닙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죽기 8일 전에 했던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생명의 존귀함, 특히 낙오된 이들의 생명에 대하여 말했다.

"교회에 인간의 생명만큼, 인간 존재 특히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의 생명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것이 무엇이든 그분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피 흘리는 사람들, 이런 죽음들은 정치를 초월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슴을 건드립니다."(로메로, 1980년 3월 16일 강론에서)

로메로의 영성은 명료하게 생명 그 자체가 신성하고, 취약하며, 죽음의 위협을 받는 공간에 뿌리를 두었다 –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로메로의 영성은 소중하다.

[원출처] <오스카 로메로-삶과 글에 관한 성찰(1917~1980)>, 마리 데니스, 레니 골든, 스코트 라이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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