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가난한 교회’를 먼저 사는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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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가난한 교회’를 먼저 사는 추기경
  • 한상봉
  • 승인 2018.04.10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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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5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맡겨진 사명은 어쩌면 자신이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원한다.”고 했듯이, 부유하고 세속화된 교회를 다시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교황의 이런 사목적 태도는 호사한 일부 고위 성직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독일 림부르크 교구장인 프란츠 페터 테바르츠 판 엘스트 주교의 사직이다. 이 주교는 주교관을 무려 3,100만 유로(약 452억 원)를 들여 신축했다. 230만 유로를 들여 대리석 회랑을 만들고, 수입 방탄유리로 주교관 창문을 달았다. 욕조는 1만 5,000유로나 된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가장 부유한 독일 교회는 신자들의 종교세와 국가 보조금, 기부금으로 교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궁이 아니라 성녀 마르타의 집에 거주하며, 침대도 손수 정리하고, 30년 된 중고차를 타고 다녔다. 교황은 “신부와 수녀들이 자동차 전시관에서 기웃거리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 관심을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쏟아야 한다.”고 탄식한 바 있다.

한편 미국 교회의 경우에는 2004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애틀랜타 대주교에 임명된 윌튼 그레고리 대주교가 부유층이 모여 사는 벅헤드에 220만 달러(23억 원)를 들여 관저를 신축해 비난을 불러왔다. 결국 그레고리 대주교는 신자들의 제안으로 이 집을 다시 매각하고 옛 관저로 되돌아갈 계획으로 알려졌다.

가난한 교회의 실험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의 이상은 사목자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아주 새로운 실험은 아니었다. 대주교 시절부터 익숙한 행보였다. 1992년 5월 20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안토니오 콰라치노 추기경의 간청을 받아들여 예수회 영신 수련 전문가였던 마리오 호르헤 베르골료를 주교로 임명했다. 6월 27일 주교품을 받으면서 베르골료 주교의 모토는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였다.

베르골료는 플로레스 지역의 보좌주교로 추기경을 보좌했고, 1993년에는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1997년 6월 3일에는 교구장 승계권을 가진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998년에 과라치노 추기경이 선종하면서 2월 28일 교구장에 취임했다. 베르골료가 대주교가 되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50만 명의 신자와 2,800명의 사제들, 850명의 남자 수도자들, 2,000명의 여자 수도자, 181개의 본당이 있는 거대 교구였다.

베르골료 대주교는 대통령 별장과 인접한 곳에 있는 올리보스의 대주교 공관을 사용하는 대신, 산 니콜라스 시내 마요 광장 가까이에 있는 대성당 주교관 2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집무실 겸 침실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비서에게 일정을 맡기지 않고 직접 수첩에 적어가며 챙겼으며, 그의 침실에는 조부모인 로사와 후안이 남긴 십자가, 그리고 직원들이 퇴근하면 난방을 끄고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전기난로가 있었다. 물론 침대가 자신이 직접 정돈했다. 옆방에 있는 서재는 책과 문서로 즐비했는데, 그 문서 가운데는 사제서품을 받기 전 ‘성령이 충만하던 시기에’ 자신의 신앙을 적어놓은 기도문도 있었다.

베르골료 대주교의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를 아들과 같이 사랑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우리 주 예수님과 성령을 제게 일으키사
제가 미소 짓고 영원한 생명의 왕국으로
달려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인생을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늘 사랑의 눈길로 저를 지켜봐 주셨고,
9월 21일 봄날 제가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습니다.

사실 저는 이기심으로 인해
메마른 고통 뒤에 숨으려고 했습니다.
편협한 제 마음으로 인해 주는 것 없이 받아 마시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선함을 믿으며,
제 개인의 안위를 위해 이들을 배신하지 않고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함을 믿습니다.
......
제 어머니 마리아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절대로 혼자 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과 활력, 배신과 죄를 현시하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놀라움이
제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리라는 것을 믿으며,
당신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는 《교황 프란치스코》 RHK, 2013 재인용)

이 신앙 깊은 교황은 전용 요리사도 없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승용차나 택시를 타는 대신 주로 시내버스를 타거나 지하철 D선을 자주 이용했다. 특히 버스는 “거리풍경을 볼 수 있어서” 즐겨 이용했다. 그리고 발목까지 내려는 긴 수단을 입는 대신에, 베르골료 추기경은 항상 클러지 셔츠에 단순한 검정색 양복을 걸치고 다니며, 거리에서 신문을 보거나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시민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사람들이 통상 대주교를 부를 때 붙이는 칭호인 ‘각하(Excellency)’를 사용하면 즉시 ‘호르헤 신부’로 불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를 자주 방문하였는데,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 등과 나눈 인터뷰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번은 바라카스에 있는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카아쿠페 교구에서 수백 명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한 벽돌공이 일어나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추기경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제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아곳으로 오면서 보니, 추기경님께서 마치 주민의 한 사람인 것처럼 마지막 줄에 앉아 계셔서 구분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저분이 추기경님이라고 동료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암브로케티는 “그때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의 가슴 한켠에 늘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다.

무조건 현장부터 달려가야

2001년 2월 21일 추기경으로 서임될 때에는 새 옷을 맞추어 입지 않고 선종한 콰라치노 추기경이 입던 옷을 제 몸에 맞춰 고쳐 입었다. 또한 서임식에 참여하려는 아르헨티나 순례객들에게 여행을 중지해 달라고 청했다. 오히려 그 여행 경비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 사용하도록 부탁했다.

200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느 나이트클럽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175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을 때, 한밤중에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도 베르골료 추기경이었다. 아직 소방차도 응급 구호차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2009년 한국에서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 주교좌성당에서 달려온 주교는 아무도 없었던 것과 비교된다.

용산 참사 이후 355일 동안, 용산 남일당 앞에서 286일 동안 뜻있는 사제들이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2010년 1월 희생자들의 합동 장례식이 열리기 전까지 서울대교구 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한 번도 용산 참사 현장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화재 현장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돌보고, 클럽 인가에 대한 규제를 철저히 하지 않은 관련 당국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특히 미혼모들과 그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표명하며,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은 사제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성직자의 위선’에 빠졌다고 혹평했다. 그리고 “이런 사제들은 구원으로부터 하느님의 백성을 분리시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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