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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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8.03.27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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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와 예루살렘- 6

하스모니아 왕조를 정복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 로마 시대는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0년) 하의 속국 단계, 헤로데 가문의 통치 단계(기원전 37-기원후 6년), 그리고 로마의 직접 통치 단계(기원후 6-66년) 등이 그것이다.

헤로데 대왕((King Herod the Great, 기원전 37-4년)은 놀랍게도 성벽은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안의 건축물들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경계가 동쪽 성벽의 역할을 하였다.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 5권 147-155에 따르면, 헤로데 아그리파 1세(기원후 37-44)가 새로운 북쪽 성벽의 기초를 놓았고, 제1차 유다 항쟁(기원후 66-70) 동안에 완성되었다.

 

기원후 66-70년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한 제1차 유다 항쟁이 일어났는데,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T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도록 명령한다.

“로마 군대는 살인과 약탈로 분노를 발산했다. 분노의 대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자, 티투스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세 개의 망대, 즉 파사엘, 히피쿠스, 마리암메 망대와 도시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만은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곳을 나중에 예루살렘에 남을 로마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망대들은 예루살렘 도시가 얼마나 견고한 요새였는지, 그리고 이 도시를 정복한 로마 군대가 얼마나 용맹하였는지를 후손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대는 성벽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래서 장차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다.”(<유다 전쟁사> 7권 1-2) 

성벽의 파괴는 티투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원후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사실상 완료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새로운 이름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에는 단지 로마 군대 제10군단의 주둔지만이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132-136년의 제2차 유다 항쟁은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313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황제의 공적인 지지를 받게 되어 예루살렘은 새로운 종교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수와 관련 있는 장소들에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였다. 예루살렘 도시는 더욱 확대되었다. 5세기에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는 그리스도인의 시온 산과 본래의 다윗 성에 성벽을 세웠다. 637년에 예루살렘은 칼리프 오마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오늘날의 예루살렘 성벽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2세(1520-1566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1537년에 북쪽 성벽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동쪽과 서쪽으로 계속 진행하였다. 남쪽의 성벽은 1540년에 완성되었다. 사실 당시에 남쪽 성벽 안에 시온 산을 포함할 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현재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는 평균 17m이고 전체 길이는 약 4km이다. 성 안, 즉 구시가의 전체 면적은 1km2인데,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곧 북쪽은 그리스도인 지역, 북동쪽은 이슬람인 지역, 남서쪽은 아르메니아인 지역, 그리고 남동쪽은 유다인 지역이다. 시온 산과 다윗 성은 현재의 성벽 바깥에 위치한다.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는 19세기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1856년에 로빈슨(E. Robinson)에 의해, 1860년에 드 솔시(F. de Saulcy)이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더욱 체계적이고 방법적인 탐사는 영국의 “팔레스티나 탐사 기금”(Palestine Exploration Fund, 이하 PEF)에 의해 진행되었다. 영국 공병대의 윌슨(C. Wilson)이 1864년에 예루살렘을 측량하였고, 1867-1870년에 워렌(C. Warren)의 주도로 탐사가 실행되었다.

그 후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탐사와 발굴이 진행되었다. 예루살렘 고고학의 역사에서 특히 1961-1968년 PEF와 여러 기관의 후원에 의한 영국의 고고학자 캐년(K.M. Kenyon)의 탐사가 중요하다. 그리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와 “다윗 성 협회”(City of David Society)의 후원에 의해 쉴로(Y. Shiloh)가 1978년에 시작하고 1985년에 끝난 탐사도 중요하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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