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섬김, 사회 전복적인 예수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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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섬김, 사회 전복적인 예수의 전략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8.01.17 0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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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마을 공동체 - 5

예수는 지배와 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세상 지도자들의 행동을 비판하며 제자들에게 지배와 폭력의 포기를 가르쳤다. 그리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에 대조되는 대안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세상의 관습적 방식에 도전하는 예수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길은 바로 섬김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

이와 같이 예수는 하느님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 사이, 곧 이방인들의 억압 체제와 하느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제시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세상의 지도자들의 관습적인 행동을 부정적인 모범으로 제시한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과 “고관들”의 경우이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두 동사 “군림하다”, “세도를 부리다”에서 표현되는 지배와 권력의 관습적인 사용은 공통적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특징을 가진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아랫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지배하고 그들의 권력과 지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영화 사진

예수는 지배와 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지도자들의 행동을 비판하며 제자들에게 지배와 폭력의 포기를 가르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는 예수 제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에 대조가 되는 대안적 공동체이다.

세상의 관습적 방식에 도전하시는 예수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길은 “섬김”이다.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섬기는 사람”은 동사 “섬기다”와 연결된다. 이 동사는 “시중들다”, “봉사하다”, “섬기다”의 의미를 가지는데, 식사 준비와 식탁 봉사를 가리키기도 하고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첫째”와 “종”은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높은 사람이 되는 길로 “섬김”을, 첫째가 되는 길로 “종”을 제시한다. 예수는 세상의 지배 관계와 지배 구조를 거부하면서 지배와 폭력의 포기에로 초대한다. 참된 제자의 길은 높은 사람과 첫째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포기이다.

마르 10,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에서 “섬김”에 대한 가르침은 이제 예수 자신과의 관련성과 연결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위한 긍정적인 모범으로 당신 자신을 제시한다. 즉 제자들의 “섬김”을 위한 토대로서 당신 자신의 “섬김”을 제시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섬김”을 통하여 예수와 연관성을 가진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표현한다. 동사 “왔다”는 예수의 사명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예수의 사명을 표현하기 위해 동사 “섬기다”가 각각 수동태와 능동태로 두 번 사용된다. 예수의 사명과 행적은 “섬김”이라는 열쇠로써 해석된다. 예수의 섬김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 이 섬김의 결실은 “많은 이들의 몸값”이다. 예수는 스스로는 해방될 수 없는 이들을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섬김”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예수는 당신의 “섬김”을 따라 제자들이 전인적이고 일관성 있는 “섬김”을 살도록 초대한다. 제자들의 “섬김”의 실천에서 예수를 뒤따르기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이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하는 마르 10,41-45에서 예수는 권위와 봉사에 대해 가르치는데, “높은 사람”과 “섬기는 사람”, “첫째”와 “종” 등이 각각 대조된다. 이 대조들은 마르 10,13-45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대조들과 연결된다. 즉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다”와 “어린이처럼 되다”(마르 10,13-16), “재산을 버리다”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다”(마르 10,17-22), “사람에게 불가능하다”와 “하느님에게 가능하다”(마르 10,27), “포기”와 “추종”(마르 10,28-31), “죽음”과 “부활”(마르 10,33-34), “영광”과 “수난”(마르 10,35-40) 등이 대조를 표현한다. 이러한 문맥 안에서 예수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도전하고 새로운 질서와 가치가 실현되는 대안적 공동체를 제시한다.

로마 제국의 지배로 말미암아 팔레스티나 민중의 삶은 경제적 착취로 고통 받았을 뿐 아니라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와 같은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사회적 형태들이 해체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로마의 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착취로 인한 결과들을 치유하고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계약의 공동체를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해체되어 가는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고, 이스라엘의 계약 전통 안에서 사회 정의와 생태 정의가 실현되는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의와 연대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위한 모세 계약 전통의 가치와 원칙을 다시 새롭게 회복함으로써 예수는 진정한 사회 변혁의 길을 제시하였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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