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만나면 불타오르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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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만나면 불타오르는 신앙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8.01.15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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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 원장이 죠셉 원장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말했다, “죠셉 원장님, 내가 할 수 있는 한 성무일도를 조금하고 단식도 조금하며 기도도 합니다. 조금 묵상도 하고 평화 속에 살려고 노력하며 할 수 있는대로 생각을 순화시킵니다. 이밖에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죠셉 원장이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쳤다. 그의 손가락은 마치 10 개의 횃불처럼 보였다. 그는 로트 원장에게 말했다, “왜 완전히 불이 되지 않습니까?”]

선인들은 이렇게 물었다, “하느님을 보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영적인 발전에 관해서 어떤 표지를 찾지만, 그 측량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을지 모른다. 삶의 모든 다른 현존들을 상대화시키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똑같이 무덤덤하고 방향이 없으며 안주하는 삶을 누가 살 수 있겠는가?

 

사진출처=pixabay.com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이 회오리바람 속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상가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이 바로 회오리바람 자체이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며 우리를 이끄는 횃불이고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생명이시다. 하느님 안의 성령이 모든 의심을 넘어 모든 실수를 초월하고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하도록 해준다. 

마음 속에 정의에 대한 불길이 없는 사람들, 이웃에 대한 꾸준한 이해가 없는 이들,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인간 공동체에 대한 맹렬한 헌신이나 자신들을 넘어서라는 도전적이고 고통스러운 부르심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들, 아름다움에 대한 비전, 일상성에 대한 인지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찾고 있을지 모르나, 그들에게 하느님은 아직도 '생각'에 불과하다. 그 생각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하느님은 그들에게 실제가 아닌 것이다.

관상은 매우 위험스러운 행위이다. 관상은 우리가 하느님과 맞대면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니다. 세계와 그리고 자아와도 맞대면하도록 한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일단 발견한 후에는 모든 것이 같을 수가 없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역시 새롭게 본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세계를 우리 마음 속에 지닌다. 사람들의 억압, 친구들의 고통, 적들의 부담, 지구에 대한 강간, 굶주림의 허기, 모든 웃는 아이들의 꿈 등이 우리와 연결된다. 깨달음은 우리 마음의 핵심에 꽂힌다. 열의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열의, 그리스 말로 “타오르는 자리”라는 뜻의 열의는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태어나게 하는 충분한 보살핌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가 없다면 삶은 기껏해야 쓸모없는 시작과 효과없는 끝 사이에서 시간만 소비하는 것이 된다. 삶을 다 바칠 만큼 충분한 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없이 산다는 것은 활기가 없는 실존에 불과하다.

물론 열의는 왜곡 될 수 있다.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지 않는 열의는 정신의 흑사병 같은 것이다. 그렇게 뒤틀어진 열의는 반유대주의, 사형제도, 마녀사냥, 동성애 공포증, 성차별주의, 핵전쟁이 되어버린다. 작은 하느님에 근거하는 열의는 종교재판, 파문, 도피 그리고 교회법적인 강제침묵으로 변한다. 베네딕도회의 규칙은 “생명으로 이끄는 좋은 열의가 있고 죽음으로 이끄는 잔혹하고 사악한 열의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 경고는 분명하다. 즉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품보다 하느님의 자리에 둘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하느님 보다 덜 한 어떤 것에 의해 이끌리고 그래서 모든 것을, 지상의 모든 사람을 불안하게 덜 사랑하는 것은 복수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악한 열의를 무릅쓰고 움켜쥐는 것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이 그들의 시작과 끝을 거기에 두고 있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열의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완전히 불로 변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언젠가 우리는 사랑으로 소모되는 자신들을 보게 될 것이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는 자신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명료한 관상의 징표는 없다. 그 때에, 오로지 그 때에만 비로서 우리의 열의는 안전하게 세상에 대한 끈을 풀게 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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