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나를 부수고 살 속에 불을 피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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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나를 부수고 살 속에 불을 피울 때
  • 한상봉
  • 승인 2017.11.20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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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벌써 20년 이상을 훌쩍 넘어버린 그 시절, 나는 어줍잖게 처음엔 노동자가 되고 싶었다. 강철노동자가 아니어도 좋았다. 나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선배들이 모여서 일하던 의자공장 작업장에서 타카를 손에 쥐고, 레자를 당겨서 박았다. 반복되는 작업이 나를 미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틈틈이 창고에 가서 스티로폼 위에 누워 피곤한 육신을 달래기도 했다. 본래 의도는 ‘노동신학’을 하자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먼저 내가 직접 노동을 알아야 했고, 노동자의 핍진한 삶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인생 뭐 있어, 잡생각에 빠지면서

그때 유일한 위안은 FM라디오. 오후 서너 시 쯤 되면 양희경이 진행하던 프로에서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인생 뭐 있어!’ 구겨진 휴지조작처럼 삶이 파쇄되고 있다는 느낌. 신학은 안 되고, 노래만 들렸다. 성찰은 안 되고 망상만 돋았다. 정신적 여유는 시간적 여유에서 오는 법, 때로 촌각을 다투는 작업 속에서 잡생각에 빠지면서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지루한’ 노동을 견뎠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사장이던 맏형 뻘 선배가 다방에 전화를 걸었다. 커피 네 잔을 시키면 아가씨는 다섯 잔을 커피포트에 담아서 들고 왔다. 어수선한 작업장 한 편을 치우고 자리 잡으면 ‘그분’이 커피를 돌린다. 아가씨가 커피 잔이 비워질 때마다 낚아채듯이 잔을 거두어 보자기로 싸서 되돌아가시기 전까지 걸리는 시간은 10분 남짓이다. 그 사이에 선배들은 온갖 야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작업장엔 나른한 오후에도 활기가 돈다. 잠깐 어느 누가 이 아가씨만큼 이토록 짧은 시간에 사람의 생기를 다시 돋우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을 해야만 생계를 도울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분이 보살이고,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진출처=pixabay.com

늙은 창녀의 노래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던 양희경이 주연으로 나섰던 연극이 있다. 모노드라마 ‘늙은 창녀의 노래’다. 송기원 시인의 작품으로 만든 극인데, 성녀가 따로 없다.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창녀’가 누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는지 알 것 같다. 

나이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
오메,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꽃값 오천 원으로 손님이 나를 사면
내 고향 들샘머리 복사꽃으로 나는 손님을 사요.
손님도 나도 잃어버린 거그
그렇지만 차마 죽어서도 돌아갈 거그
오막살이 지붕 우에 저녁별 돋아나먼
우리 함께 복사꽃으로 피어날 거그

손님들이 모두 남 같지 않다는 늙은 창녀의 고백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게다가 그가 맞이했을 손님은 하나같이 가련한 인생들이다. 세상에서 그닥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교회조차도 가난한 노무자들을 기꺼이 받아주는 품을 가지지 못할 때, 그들이 교회의 몫을 대신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지기를, 다른 이들의 고통 받는 몸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란다”(270항)고 했다. 거기서 그들과 한 백성이 되는 강렬한 경험을 하라고 촉구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의 끝없는 슬픔을 당신의 끝없는 사랑으로

교황은 우리를 매료시키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온 생애에서 보여주신 “가난한 이들을 대하시는 방식, 그분의 몸짓, 그분의 한결같음, 그리고 소박한 일상에서 보여주신 그분의 관대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완전한 봉헌”으로 인간에게 말을 건넨다며, 예수님은 “우리의 끝없는 슬픔을 당신의 끝없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복음이라 전했다.(265항)

내가 일했던 의자공장 사람들은 다방에서 차를 시켜 마시다고 해서, ‘마초’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이다. 제 땀을 흘리고서야 낟알을 집어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벌이는 잠시의 농지꺼리를 나무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봉헌생활자들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농부 떼모뻬이 본다료프는 창세기를 이렇게 묵상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시킨 일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즉 남자는 땀을 흘려 빵을 생산하고, 여자는 고통을 치러 아기를 낳으리라는 것이다. 황후도 아기를 낳으려면 고통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하는 일에는 불합리한 변화가 생겼다.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로 나뉘어졌으며, 모든 일 중에 가장 근본적인 일에 해당하는 농업을 오히려 멸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돈으로 빵을 산다. 돈만 있으면 된다. 그 결과, 하느님이 당부한 일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쓰게 되었다. 

들판의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새나 물속의 고기들이나 하느님이 시킨 대로 살고 있는데, 교육받고 지식 있다는 인간만이 사명을 회피하고 있다. ... 노동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의 설교는 위선이나 다름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짚신을 신고 매일매일 호미를 손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의무가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나르거나 뒷간 청소를 하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요 동포에게 그것들을 나르도록 뒷간통과 쓰레기통을 채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허름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고 신발 없는 이들의 옆을 고급 구두를 신고 손님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끄럼이며, 외국이나 최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빵을 만들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라고 말했다. 이어 “더럽혀진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이처럼 노동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깊은 영적 갈증을 해소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자신의 수고로운 노동을 통해, 아니면 노동하는 타자를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서 ‘하느님’을 만질 수 없다면, 해고노동자 등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마음이 간절하게 그들에게로 가서 ‘한 백성’이 되려면, 그들 안에 머무시는 그분의 호흡을 느끼는 것이 우선이다. 수도자들이 ‘청빈’서원을 하는 것은 단순히 수도원 재산을 절약해서 나눠쓰자는 의도만이 아닐 것이다. 앗씨시 프란치스코가 ‘가난 부인’이라는 표현을 썼듯이, 가난한 이들 속에서야 하느님을 온전한 얼굴로 뵈올 수 있으니, 나 역시 가난하여 연모(戀慕)하던 그분을 뵙고자하는 것 아니던가.

 

박영근 시인

박영근 시인 “침묵이 침묵의 뜻을 얻을 때까지 너를 잊겠다”

노동사목을 하면서 만난 노동시인이 있다. 주안공단 언저리에 살던 그이는 박영근. 그를 내처 탓할 수 없으나, 술이 아니고서는 참아내기 힘든 시절을 살면서, 요절해야 했던 선배였다. 그의 선한 눈매를 잊을 수 없고, 그의 서늘한 시어를 접을 수 없다. 그가 “침묵이 침묵의 뜻을 얻을 때까지 너를 잊겠다”고 썼다. 노동하는 인간들이 사람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그 날까지는 침묵 속에서가 아니라 '아우성' 속에서 하느님 그분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중대한 키워드는 ‘침묵’이든가 ‘사랑’이다. 때로 사랑을 위해 침묵을 유보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박영근은 '변명'이란 시에서 “사랑이 나를 부수고, 제 살 속에, 핏속에 불을 피울 때까지, 사랑이 사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침묵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생활과 시 사이에서 때묻은 지폐처럼 변명은 나를 길들이고, 아 나를 끌고 가는 이 깊은 그림자”라고 사랑을 얻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허나 “소리치는 빗속에서 빗소리도 잊고,바람에 흔들리다 흔들리다 쓰러지는 빗줄기의 눈물겨운 몸짓도 잊고” 잠시 침묵을 청하기도 한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께서 옹졸한 ‘나’(ego)를 부수고, 내 살과 핏속에 사랑의 불을 피워서, 이미 사랑이 된 내가 ‘사랑’이라고 발음할 수 있는 날을 우리는 얼마나 기다리는지. 사랑으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그분이 오실 길을 마중 나가는 일이 신앙의 본질이다. 하느님게 나를 봉헌하고, 그처럼 그분의 분신인 가련한 인생들에게 나를 주고 있는지 곰곰이 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 <영성생활> 2014년 3월호에 게재햇던 글을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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