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단진복] 평화조성은 기도와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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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단진복] 평화조성은 기도와 경청이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1.13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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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4]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복되도다-5

우리가 필요로 하는 평화조성가는 누구인가? 그건 우리 모두이다. 평화를 조성하는 진복은 매일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평화를 섬기는 일은 쉽지 않다. 가까이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흔히 더 어렵다. 배우자, 친척, 동료, 고용주 혹은 이웃과 대화하는 것은 텔레비젼에서만 보게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적과 대화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집에서 텔레비전 보기, 식사예절, 접시 씻기, 샤워하는 시간, 방 청소 등 수많은 일상 안건들에 관한 많은 전투에 있어서는 내 아내가 노벨 평화상을 받아 마땅하다. 아내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말다툼, 불일치 그리고 오해 등을 겪으며 우리들이 말하고 경청하는 방식을 개발하도록 도와주었다. 아내의 이런 성공은 단지 가족 안에서뿐만 아니라 집 바깥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관해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사진출처=pixabay.com

평화조성가는 '얼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스 정교회 사제의 부인이며 사무행정가로 일하고 세 아들의 어머니인 드니즈 질리옹으로부터 온 최근의 편지를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문제나 주제가 작건 크건 상관없이 평화 조성가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들들 중 한 아이가 싸우지 않고 다른 아이가 쥬스를 먼저 따르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영웅적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그리고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분의 용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천사들의 군단을 불러와 싸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적들에 대해 아버지의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화조성가가 되는 것은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결코 어울릴 수 없습니다. 평화조성은 모든 ‘재미’를 다 빼버리는 일이며 ‘얼간이’ 혹은 어리석다는 무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화조성가가 되는 일은 움직이지 않고, 진리를 위해 일어서지도 않는 ‘유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의 내용이 수동적인 행위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평화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독선과 이기심으로부터 나오는 갈등을 피하는 것도 평화 만들기, 혹은 오히려 ‘전쟁 방지’의 행위입니다. 평화 만들기는 벌집을 쑤시는 것 같은 큰 소동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특히 그분의 추종자들이라는 교회에서 전혀 보여지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 관하여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짜라고 혹은 이단적인 견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 자주 그들을 경멸한다. 불일치는 필요할 것이다 ­진리의 방어는 덕이지만, 미움은 중죄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싸우는 것은 진리 때문이 아니라 어떤 선택 때문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의 입증이거나 혹은 그냥 우리식대로 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나는 본당들이 어떤 문제들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싸움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5년이 지난 후 그들에게 그렇게 문제가 되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한심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서로간의 균열과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을 가질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본당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개인들,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긴장의 시간 속에서도 조용한 노력들을 하는 덕분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얼굴과 귀의 환대

눈과 귀는 평화조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주의를 덜 하면서 들을수록, 상대방에 관하여 주의를 덜 하게 되며, 풀릴 수 없는 갈등에 말려들기 쉽다. 적극적인 경청은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에 조용하고 인내롭게 주의하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최근에 뿌리를 많이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경청하는 사람은 반대자들이 그들의 말을 상대방이 열심히 듣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이해와 세밀한 주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경청은 분위기를 극적으로 바꿀 수 있고 진정한 대화가 일어나게 만든다. 대화를 하면서 의식적인 경청과 다른 사람의 얼굴, 신체적 움직임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대화가 가능하지 않다. 요구되는 것은 얼굴과 귀의 환대이다.

평화조성에서 여전히 더 중요한 측면은 기도이다. ­적들, 반대자들, 혹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거나 우리 삶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로즈메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위한 일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은 기도와 경청” 이라고 상기시킨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간다. 당신은 당신이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절대로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는 늘상 다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하는 내적인 통로를 우리 안에 열어준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반대자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는 자주 그들을 존경하지도 않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틀린 것은 그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들이 크게 잘못했다 해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어떤 태도나 반응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우리자신의 잘못도 문제의 중대한 측면이다. 토마스 머튼이 도로시 데이에게 썼던 편지를 보자:

"사람들은 지성 한 가지나, 원칙 한 가지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적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는 열쇠를 얻는다. 오로지 이러한 깨달음만이 우리들에게 우리의 의무와 올바른 행동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열어 준다.

사람들에게 문을 닫고 그를 한 인격체로, 다른 자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비인격적인 법'과 추상적인 '본성'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존재의 실재를 차단시키고, 우리 본성과 그의 본성 사이의 상호교류를 끊으며, 우리자신의 권리, 주장, 요구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형제에게 자행하는 악을 합리화하는데, 그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 단순히 적이며 비난받아야 할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교류를 회복시키고, 그와 내가 본성에 의해 하나임을 보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개인적 권리와 통합성을, 그의 사랑 받을 가치를 존중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와 비슷하게 비난받아야 하고, 그처럼 꺼질 수 없는 은총과 자비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를 내려 누르는 대신, 그의 머리를 우리자신이 올라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여 올라가려고 하는 대신, 그가 오르도록 도움으로써 우리자신이 오르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적을 향해 우리 손을 뻗칠 때에 하느님께서 우리 둘 다에게 오시기 때문이며, 우리의 손을 적에게 뻗도록 먼저 해 주는 분은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적 속에 있는 “그분 자신을 구원하는 존재”는 바로 그분이며, 우리 적 안에 있는 그분의 모상인 잃어버린 양을 찾도록 우리를 이용하는 분이시다."

평화조성가는 손상된 관계들의 치유를 돕기 위하여 하느님이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다. 사막의 성인인 가자의 도로테우스는 수레바퀴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콤파스로 한 점을 잡고 원을 그려보자. 중심점은 주위 원의 어떤 지점으로부터도 같은 거리에 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다음의 내용에 집중하자! 이 원이 세계이고 하느님이 중심점이라고 상상해보자; 주위 원으로부터 중심점까지의 직선들은 사람들의 삶이다. 영적인 것에 들어가는 정도만큼 성인들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갈망한다; 그리고 영적인 것에 발전하는 정도만큼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가까이 간다. 하느님께 더 가까울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그리고 서로에게 더 가까울수록 그들은 더 하느님께 가까워진다.

이제 똑같은 맥락 속에서 분리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고 외적인 것에 돌아설 때에 그들은 더 하느님으로부터 물러가고 더 멀어지게 되고, 이웃간에도 더 멀어지게된다. 자 보아라!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더 돌아서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이웃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그분의 사랑을 통해 이웃과 더욱 사랑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 더 일치될수록 하느님과 더 일치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에게 적합한 가를 우리가 잘 듣고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기를. 왜냐하면 우리가 듣는 것에 적절한 주의를 하고 또한 그것을 수행하는 만큼,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밝혀주시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다."

 

짐 포레스트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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