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가톨릭은 눈 먼 장님, 개신교는 눈 뜬 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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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가톨릭은 눈 먼 장님, 개신교는 눈 뜬 장님"
  • 한상봉
  • 승인 2017.11.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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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볼품없는’ 그리스도-2
목동들의 경배, 렘브란트

빛의 형이상학

렘브란트를 ‘명암법의 화가라고 하지만, 그건 단순히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종교화가이며, 의미를 중심으로 밝음과 어둠을 직시하였다. 동판화 <목동들의 경배>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한 목동이 들고 있는 등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의존해 그려나간다. 이 작품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과 가난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어둠을 강조한 것은 어둠 자체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다만 삶의 고난과 비참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간의 삶이 추하면 추한 대로 놔둔다. 그는 삶을 어떤 식으로도 이상화하지 않았으며, 거짓되게 미화하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먼지 쌓인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했던 렘브란트는 인간의 삶에 드리워진 암흑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악의 화신을 보지는 않았지만, 이 악이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간파했다”(발터 니그)

그러나 렘브란트는 염세주의자가 아니었고, 항상 암흑 한가운데 한 줄기 빛이 비치도록 한다. 이 빛이 소중한 모든 것을 꿰뚫어 빛나고 있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따뜻함을 발산한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는 구절처럼, 빛은 아주 잠깐 인간 가운데 머물지만, 우리를 그 빛 가운데 걷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이 빛은 도덕의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빛이다. 렘브란트에게 하느님의 해가 선인에게만 비춘다면 어떤 사람에게도 해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었다.

종교화가, 고흐와 렘브란트

고흐는 “렘브란트가 신비 안으로 너무나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한다”고 했다. 특히 <유다인 신부>를 보고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그대로 믿어다오. 이 그림 앞에서 보름 동안 마른 빵 부스러기만 먹으며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삶의 십 년을 기꺼이 바치겠다.” 또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 없이는 렘브란트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발터 니그는 <렘브란트, 영원의 화가>에서 렘브란트에게 신앙은 처음이자 끝이며 그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그림은 종교적이었지만, 중세 화가들의 작품처럼 교회에 걸려 있지는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신앙인의 삶이 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테파노의 순교, 렘브란트

스테파노의 죽음; 순교와 고백

그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그린 첫 작품이 <스테파노의 순교>(1625)이다. 여기서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믿는 길은 날마다 죽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복음과 종교개혁의 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나는 환쟁이가 되었지만 스스로는 목사, 신학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말로 구구절절이 복음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림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건물들은 폐허를 연상케 한다. 당시 유대교는 자신들이 만든 율법과 제의에 집착해 있었고, 유대교를 대표하는 바리사이와 사제들은 스테파노를 죽이고 있지만 사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유대교였다. 그래서 사제의 제의를 입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스테파노이다.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네덜란드는 우트레흐트 연합이라고 부르는 7개주 연합을 중심으로 스페인에 대해 독립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더 이상 스페인과 로마가톨릭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결사항전을 벌였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개혁파를 상징하고, 사울과 바리사이파는 자유로운 신앙을 핍박하는 가톨릭을 상징한다. 당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비유했다. 이때 렘브란트가 남긴 말은 이러하다.

“고백 없는 순교는 열정에 사로잡힌 맹목에 다를 바 아니고, 순교 없는 고백은 공허한 말장난과 독백에 다를 바 아니다.”

 

토빗과 안나, 렘브란트

토빗과 안나: 가톨릭은 눈 먼 장님, 개신교는 눈 뜬 장님

마르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를 더 존경한 렘브란트는 <토빗과 안나>(1626)라는 작품에서 아내가 새끼염소를 훔쳤다고 생각하면서 슬픈 표정으로 기도하는 토빗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 토빗이 시력을 상실하자, 아내인 안나는 하루 종일 베를 짜서 주인에게 갖다 주고 삯으로 새끼염소 한 마리를 얻어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먼 토빗은 아내의 말을 믿지 못하고 불안과 염려로 가득차 있으며, 안나는 자신의 진실을 믿어주지 못하는 남편을 향한 어리둥절함과 불만을 안고 서 있다. 토빗의 경건함이 안나의 신실함을 읽어내지 못한다.

토빗과 같은 가톨릭교회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온갖 성상과 성물이 가득 들어찼다. 본래 성상과 성물은 신자들의 믿음을 북돋기 위한 도구였지만, 구복신앙과 미신을 조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를 문제 삼은 종교개혁가들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로마교회는 단죄하는 데 급급했다.

“우리가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따랐던 로마교회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집착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구원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말만큼 우리 눈을 멀게 한 것도 많지 않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가 발견한 복음을 새로운 것이라며 이단으로 몰았지만, 우리 공화국(네덜란드)은 스페인의 압제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종교개혁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렘브란트는 그렇다고 종교개혁을 무조건 환영하지도 않았다. 미신에 물든 가톨릭이 ‘눈먼 장님’이라면 개신교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눈 뜬 장님’이라 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처음부터 제시하셨던 옛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렘브란트는 몸을 떨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처음부터 제시하셨던 옛길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기운이 퍼져가면서 새로운 종류의 맹목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가? 자유와 번영을 복음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미신에 물든 토빗과 같이 눈먼 장님이었다면, 우리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선지자 발람과 같이 눈 뜬 장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조]
<렘브란트의 하느님>, 안재경 지음, 홍성사, 2014
<렘브란트, 영원의 화가>,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08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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