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언론, 무엇에 주목할 것인가?
상태바
교계 언론, 무엇에 주목할 것인가?
  • 김유철
  • 승인 2017.11.13 12: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유철의 Heaven's door]

무엇을 ‘언론’이라 부를 것인가? 세상은 단순히 언론의 외적 형태만 보고 언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예전에는 언론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을 언론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한국천주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언론이 자리 잡고 있다. 방송과 신문, 잡지 등 고전적 언론의 모습과 함께 교회 안에 온라인매체가 등장한지도 10년 가깝게 된다. 현재 각 매체는 무엇을 담고 있으며, 신앙인 독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때로는 손석희의 <뉴스룸>을 꿈꾼다

교계 언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지향점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만날 수밖에 없는 교계제도라는 구조가 가진 한계 그리고 인적, 물적 자원이 파생시키는 숱한 모순적 상황이 있다.

천주교회의 교세와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런 일 또한 늘어날 것이다. 교계 언론이 과연 그런 일을 어떤 눈으로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접근해 보도하는지의 현주소는 늘 숙제이며 당면과제다. 교계 언론에게 손석희의 <뉴스룸>과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이룰 수 있는 혹은 없는 꿈일까?

 

사진출처=pixabay.com

도대체 언론으로 우리는 뭘 하자는 걸까?

언론은 ‘거울’과 ‘횃불’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드러난 모습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또 하나는 ‘횃불’로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기능이 다. 마치 그것은 출애굽 때 밤을 밝히던 불기둥이다.(탈출 13,21-22) 언론은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독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교회용어로 언론은 예언자직이라고 한다. 성경이 전하는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신앙이, 그 신앙을 이끄는 무리가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쇄신하고자 원초의 체험으로 돌아갈 것을 부르짖었다. 예언자들은 당시의 절대권력인 왕을 비롯한 율사와 제관들, 이른바 사회 기득권자들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초기 신앙인들은 눈이 밝았던 것일까? 율사와 제관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 안에서 그들은 놀랍게도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율사와 제관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했다―지금은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율법과 성전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 선’이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은폐되었다. 어쩌면 하느님 자체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로 사람들에게 전했다.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언론이지 않은가? 문제는 지금 교계 언론의 현주소는 그러한가 이다.

교계 언론의 지도는 황금분할(?)이다.

<시사인>의 여론조사(2017.10.10.)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과 언론인으로 JTBC <뉴스룸>과 손석희 앵커가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른바 ‘손석희 저널리즘’은 ‘선택’과 ‘집중’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보도로서 사람들은 <뉴스룸>의 보도방향을 신뢰하고 동의하며 열광했다. 나열식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끝까지 가보는 ‘아젠다 키핑(Agenda keeping, 설정한 의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는 것)’이란 의미에서 손석희와 <뉴스룸>은 세상 속으로 세월호 참사, 4대강, 국정원 해킹 의혹 등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그것을 지켜냈다. 그러한 일은 당연히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관해 교회가 기념하는 날을 홍보주일이라 한다. 이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천주교회는 언론의 역할을 ‘홍보’라는 치마 폭 안에서 생각하지만, 세상은 언론을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전하며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올바로 제시하는 예언자로서 여기고 있으니 무언가 뒤바뀐 모습이 아닌가?

어쩌면 한국천주교회 언론 지도라고 할 1잡지(경향잡지), 1방송(평화방송), 2종이신문(가톨릭신문, 가톨릭평화신문), 2온라인매체(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가톨릭프레스)의 보도현실은 이미 각 매체에 고스란히 담겨서 전달되고 있다. 어쩌면 언론의 신이 오묘하게 교계 언론의 구도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교계언론이 각 홈페이지에 내건 ‘자기소개서’에 나온 정체성과 현재의 보도 내용 비교만으로도 자신들의 보도가 걸맞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논어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세상 평가의 그물은 성근 듯해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법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독자들은 무엇을 알고 싶고, 언론은 무엇을 전할 것인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른바 지동설을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조심스럽게’ 내놓았지만,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1633년 갈릴레오는 지동설로 인해 종교재판을 받았다. 당시 정설이 된 지동설을 교회의 심판까지 받아가며 힘겹게 주장해야 했던 것처럼, 지금 교종 프란치스코는 광야에서 홀로 ‘지동설’을 외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교종은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듯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코페르니쿠스의 데자뷔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심지어 ‘성 비오 10세회’ 총장 베르나르 필레 주교를 비롯한 40여 명이 교황권고 『사랑의 기쁨』의 내용과 관련해 교종을 ‘이단’으로 지목했다는 보도(미국 <CNN> 2017.9.25)를 보면서, 교종 프란치스코가 코페르니쿠스에서 이제 갈릴레오가 되는구나 싶었다.

교회 안에 기생하는 극보수주의자들이 하는 해프닝으로 여길 것인가? 그렇다면 진보적 신앙인―신앙인이라는 말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모두 포함된 말이다―이거나 적어도 교종 프란치스코에 의해 임명된 추기경과 주교들은 교종의 『신앙의 빛』,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자비의 얼굴』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들의 ‘양 떼’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아니 복음적으로 전하며 실천하는가? 혹은 귀가 먼 듯, 눈이 먼 듯, 입이 닫힌 듯 지내거나 마음에 없는 변죽만 울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교종이 하려는 교회의 쇄신과 개혁, 구조조정과 적폐척결 등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지 교계 언론들은 주목하고 보도해야 한다. 교종의 말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거나 한때의 영웅이나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제도교회가 아니라 어쩌면 교계 언론이 부채질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교계 언론이여,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한국교회와 각 교구, 교구와 본당, 교회와 신앙인의 자리매김을 ‘선택’과 ‘집중’이란 개념으로 각 언론 매체는 알맞게 보도하고 독자들에게 판단 받고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교계 언론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는 게토가 아니기에 세상과의 연대가 가장 큰 소임이기도 하다. 본당 이름을 지역명으로 쓴다면 우리는 ‘지역’에 빚을 지는 것이며, 나라 이름을 종교명에 붙여 한국천주교회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그러했듯이 ‘평화전문가’로서 나라와 지역에서 평화의 파수꾼으로 살아야 하고 교계 언론은 그것을 매번 새롭게 조명해야 할 임무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을 잘 안다. 항간에 많은 이의 걱정을 넘어서 분노를 사는 전직 사제의 행적, 현직 사제와 수녀의 구속, 복지시설과 병원, 학교를 망라한 사례별로 다양하게 축적된 사람과 구조에 관한 문제점들을 알면서도 자정 능력이 있는 것일까 의심이 갈 정도로 현재의 교회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 모든 일은 교종이 말하는 복음의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고, 예수가 그토록 강조하던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는 말에 대한 불신의 결과이다. 과연 독자들은 무엇이 알고 싶고, 언론은 무엇을 전할 것인가?
 

* <가톨릭평론>(우리신학연구소. 2017년11-12월호) 에 기고한 글을 요약한 것임.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