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년, 여전히 분노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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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년, 여전히 분노해야한다
  • 유대칠
  • 승인 2017.11.07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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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17]

죽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죽음 이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두렵다. 경험할 수 없는 죽음 이후, 어찌 보면 도저히 알 수 없어 너무나 두렵다.

착하게 살면 분명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천국은 바로 그러한 이들의 공간이란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착하게 살아야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를 저지르는 것이 현실의 공간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죄도 있지만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그래서 그 누군가의 불행을 낳는 죄도 있다. 이런 죄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정말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불안과 싸울 무기가 필요했다. 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고해성사’였다. 자신의 죄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스스로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어찌 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해야 했다.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죄를 지워야 했다. 죄와 싸워야 했다. 이미 저지른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길, 그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길은 고해성사였다.

 

Fra Angelico, Hell (detail) Triptych: The Last Judgement, Winged Altar, 1395

고해성사와 지옥의 탄생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매년 고해성사를 해야한다는 규칙을 정해서 고해성사의 비중을 강화하였다. 지옥은 악한 사람이 될 가능성을 가진 이를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좋은 장치가 되었다. 처벌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구원을 향한 보다 더 현실적인 선행을 간절하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지옥 앞에서 일어난 고뇌와 불안이 당시 사제들에겐 구원의 길로 사람들을 이끄는 수단이 되기도 했단 말이다.

그러나 그 불안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미사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다. 보르들레의 한 영주는 5만 번의 미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초자연적인 성사를 두고 교회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지옥을 시각화했다. 지옥은 악덕과 무질서의 고통으로 가득한 공간이란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 속 지옥은 사탄이 왕이 되어 저주 받은 이들을 괴물의 아가리로 던져버렸다. 불안했다. 절대 괴물의 아가리로 속으로 자신이 던져지길 원하지 않았다.

교회는 그 불안을 이용했다. 어차피 지옥을 간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가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안식하지 못하는 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가 퍼뜨리기 시작했다. 죽기 싫은 인간, 죽음 이후 고통을 원하지 않는 인간, 그 인간들에게 교회에서 봉헌하는 미사는 그 불안을 해소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망자를 위한 미사는 이제 교회 소득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지옥이란 장치로 선행을 촉구하고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구원의 길을 떠나자 이야기하던 이들의 마음은 너무나 순진했다. 불안을 없앤 구원의 길보다 불안이 더 커지길 원했다. 그리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장치를 제시하며 돈을 벌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유령 이야기들이 많아진다. 슬프게도 교회는 신자들의 아픔과 불안을 이용하는 법을 배운 셈이다.

 

Dirk Bouts, Enfer (1450, Musée des Beaux-Arts, Lille)

이기적 사랑을 부추기는 신앙

지금도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말이 이젠 제법 친숙하다. 그 여덟 글자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그 불안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들어있다. 바로 ‘신앙’이다. 여전히 많은 종교는 이 불안을 이용한다. 불안에 대한 처방으로 신앙은 이타적 사랑이 될 수 없다.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이기적 사랑이 될 뿐이다. 당장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있었다. 죽음 앞에 불안해 하는 민중의 아픈 마음을 이용하던 교회에 대한 강한 분노가 있었다. 그 분노로 교회는 나누어졌다. 십자가 고난의 예수, 루터는 그 잔혹한 장면에서 보이는 것과 보아야 하는 것을 구분해 이야기해주었다. 보이는 것은 잔혹한 장면일 수 있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 장면의 모두는 아니다. 그 장면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헌신이다. 이기적 욕심이 아니다. 이타적 사랑이다.

루터는 분노했다. 죽음의 불안을 이용하는 교회에 분노했다. 지옥으로 겁을 주며 주머니를 열게 하는 교회에 분노했다. 민중의 아픔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교회에 분노했다. 정말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으로 아파하는 민중을 이용하는 교회에 분노했다. 정말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교회에 분노했다.

500년이 흘렀다. 지금 교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오히려 더 이기적으로 변한 듯하다. 부산 형제복지원의 원장은 개신교회의 장로였다. 대구 희망원의 비극은 천누교 대구교구의 운영 가운데 일어났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한 수녀는 제약회사로부터 불법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어느 신부의 폭력 장면과 한 유치원의 수녀가 보인 원아를 향한 가혹 행위는 충격이었다.

지난 9월 캄보디아에선 10대 소녀를 성폭행한 한국인 목사가 징역 14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다시 분노해야하는 이유를 굳이 어렵게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네 일상 곳곳에 분노의 이유들이 가득하다. 500년이 지나도 말이다. 여전히 말이다. 여전히 교회 안에 너무나 이기적인 모습이 곳곳에 보이니 말이다. 여전히 말이다. 여전히 분노해야 할 이유는 그대로다. 이제 분노하자. 지금 당장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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