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단진복] 순수한 마음에 깃드는 하느님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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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단진복] 순수한 마음에 깃드는 하느님의 영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9.1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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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9] 복되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

"자비를 네 안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무겁게 하라. 하느님의 거룩한 본질과 거룩한 정수를 닮고 참으로 보여주는 연민을 거울로 삼아 우리 모습을 살펴보자. 무자비하고 냉정한 마음은 결코 순수해질 수 없을 것이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

"오직 부서진 마음을 통하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오스카 와일드)

"오직 마음으로써 우리는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앙투안 마리 로제드 생텍쥐페리)

 

사진출처=pixabay.com

영의 가난, 애도,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허기와 갈증, 자비. ­이제는 마음의 순수함이다. 진복들은 서로 포개진다. 자비는 마음의 순수함과 갈라질 수 없다.

무엇이 순수한 마음인가?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애도할 수 있는 마음, 올바른 것에 갈증을 느끼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갈라지지 않는 마음이다.

“갈라진 마음은 산란함의 징후이며, 영혼의 분산이라고까지 말 할 수 있는데, 한 가지를 원하지만 마치 다른 것을 원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현대 심리학은 이런 현상을 ‘자기 파괴적인 행위’이며 ‘초점의 결핍’이라고 묘사한다”며 제임스 실버 신부가 최근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였다.

마음을 지켜주는 영적인 가치관들은 기억, 깨어있음, 방심하지 않음, 관찰함, 주의, 관심, 희망, 믿음 그리고 사랑이다. 마음의 순수함에 반대되는 것은 모든 종류의 욕망이며 ­재물, 인정, 권력, 복수, 다른 이들에 대한 성적인 이용 등­ 그것은 직접 행동이나 상상으로 일어나든 상관없이 다 욕망이다.

카타로스, 깨끗한 몸, 순수한 마음 

고전 그리스어로 “순수한”을 표현하는 말, 카타로스(katharos)는 얼룩, 더러움, 오점 혹은 불결함이 없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물이 섞이지 않은 포도주, 이물질이 없는 순금, 공기처럼 투명한 샘물,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진 빵을 말하는 데에도 쓰이는 단어이다. 또한 거짓말, 반(半)진실, 혹은 슬로건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언어를 가리키기도 한다. 악덕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뇌물을 절대로 받지 않는 공무원, 완전히 진실하고 올곧은 사람을 표현할 때에도 쓰인다. 이 단어와 연결된 그리스말로 카타르시스(katharsis)가 있는데, 이 말은 “순화의 행위 혹은 과정”을 의미하며, 카타르테리언(katharterion)이란 말은 “정화과정을 거친 액체”로 병든 몸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

구약 시대에 순수는 기본적으로 예식 생활과 그 훈련에 관한 문제였다: 먹을 수 있는 음식, 혹은 올바로 행해진 정화(淨化)예식을 의미했다. 예식상의 순결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돼지고기나 갑질 물고기를 먹지 않고 고기와 낙농제품의 분리를 요구했다. 배임시기의 모든 여성들은 매달 생리 기간이 끝난 후 흐르는 물에 목욕을 해야 했다; 비슷하게, 예식 생활의 출발로서 속죄의 날에, 대사제는 몸을 다섯 번 씻고, 손과 발은 10번 씻어야 했다. 아론의 모든 남자 후손들은 사제가 될 수 있으나 법에 명시된 모독행위 147개 행위가 하나도 없어야 했고 금지된 결혼의 아들이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순결은 단순히 신체적 조건뿐 아니라 내적인 자질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의 하나됨 혹은 통합, 올곧고 비난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 깨끗한 마음,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분의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맹세 하지 않는 사람." (시편 24,3-4)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내 안에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하고 새로운 영을 내 안에 세워 주소서." (시편 51,10)

순수한 마음이 없다면, 기도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느님이 이사야에게 말한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네가 한다 해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의 손이 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순수함의 요건들은 무엇인가? 이사야의 말은 계속된다:

몸을 씻어,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정의를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15-17)

그리스도는 마음의 순결을 원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식상의 정결은 더 이상 부담스러운 주제가 아니다. 비록 세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할 때 예식상의 목욕이 회개의 중심적인 상징이었고 그리스도교의 성사에 기반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마음의 순결을 강조한다. 그는 정결의 법을 따르지만 자비가 부족한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교한다: 겉은 아름답고 깨끗하지만 안에는 죽은 뼈로 가득하고 죽음의 악취가 난다.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만일 신약성서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타날 때마다 동그라미로 표시한다면, 당신은 바쁘게 연필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표시한 구절들 중에 다음의 구절들이 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오 6,21), “너희가 마음으로부터 너희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마태오 18,35),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 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22,37),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루가 1,66),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9),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루가 6,45),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가 24,32), 그리고 “너희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말고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

복음서에서는 왜 그렇게 마음을 강조하는가? 머리 중심의 우리사회에서 그리스도가 “정신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되도다”라든가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은 복되도다”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보고 우리는 놀라야 한다. 결국 우리는 영혼이나 마음이 아니라 머리가 우리 자아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의 사람들이다.

“똑똑하다”는 말은 아주 높이 칭찬하는 말로 간주된다. 영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상류계층에 합류하려는 겨냥을 하고 그렇게 될 때 굉장한 보상을 받게된다. 아무도 “느린” 혹은 “우둔한” 사람들로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리석은”이란 단어가 거의 저주하는 말에 가깝고 그래서 살인할 허가를 얻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우리문화의 빈곤함이다. 임신한 여인이 다운증을 가진 아이를 갖고 있다면 자주 낙태를 권고 받는 것이다.

마음, 성실한 느낌과 믿음의 저장소

머리는 이 세계에서 뜨고 있는데, 반면 마음은 피를 공급하는 근육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펌프쯤으로 격하되어 왔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마음은 인간의 정체성에 있어 중추임을 나타내는 은유였으며, 우리의 사랑하는 능력과 연결되고 신체적인 중심일 뿐 아니라 영적 삶의 중심으로 여겨져 왔다.

마음에 관한 은유적인 의미는 우리시대에 아직도 확실하게 유지되고 있다. 마음을 근육이라고 확인한 후, 미국의 백과사전은 “한 존재의 실존, 감성과 감수성의 생동감 있는 중심; 가장 깊고 성실한 느낌과 믿음의 저장소”라고 정의한다. 한 러시아 작가에 의하면 “마음은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중심이다. 영혼뿐만 아니라 영의 중심이고 영뿐만 아니라 신체의 중심이며,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의 중심이다; 우리세계에서 마음은 인간존재의 절대적인 중심이다”라고 한다.

 

세라핌, 순수한 마음의 사람

우리는 어떤 거룩한 사람의 얼굴에서 순수한 마음을 감지하고, 수세대 전에 죽었지만 성인들의 이야기에서 순수한 마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성인들 중의 하나인 사로브의 세라핌은 피터대제 시대와 동시대인으로서, 황제가 막강했던 만큼이나 온유한 사람이었다. 세라핌의 그림이 없는 러시아 교회가 없을 정도이다.

세라핌은 쿠르스크의 한 상인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9살 때 어느 발판에서 떨어진 후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느님의 어머니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1778년 19살 때에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1793년 사제로 서품된 지 수년이 지난 후 그는 공동체에서 몇 마일 떨어진 외딴 나무집에서 홀로 사는 허락을 얻었다. 그는 그것이 그의 “거룩한 땅”이었다고 말한다.

이 집에서 그는 기도생활, 성서읽기, 성인들에 관한 자료들 공부, 정원 돌보기, 나무 자르기의 삶을 유지하였으며, 사막의 교부들을 기억하고 검소한 삶을 포용하였다. 그의 은둔소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세 도둑들이 그를 거의 죽도록 때린 적은 있으나 주변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들은 그를 절대로 습격하지 않았다. 침입자들이 후에 잡혔을 때, 세라핌은 그들을 위해 변호하였다. 방문객들은 때때로 그가 곰, 늑대, 뱀, 도마뱀 등과 빵을 나누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당신이 그들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빵을 가방에 가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언제나 먹을 것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고 세라핌이 대답했다.

하느님의 치유하신다

후에 그의 오두막은 순례지가 되었다. ­알렉산더 1세 황제도 그곳을 찾아 왔었다.

한번은 중병이 든 한 지주가 그를 찾아왔다. “가난한 세라핌에게 무엇을 부탁하려고 왔습니까?” 하고 은수자가 물었다. 방문객이 그의 상태를 설명한 후, 세라핌은 그를 위해 기도하였고, 그 남자는 병이 나았다. 기쁨에 넘쳐 그 남자는 세라핌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고집하면서 다만 기도하였고 하느님만이 치유하신다고 말하고 나서 세라핌은 부자인 지주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충고했다.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거룩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 모든 것에 지주가 동의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주가 가난을 포용한 것이 그의 육체가 나은 것보다 더 큰 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방문객들과 말하면서 성 세라핌은 “성령의 향유”를 강조하였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 나라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기도와 단식을 하며, 세라핌은 사람들에게 고행의 실천은 단지 더 큰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상기시켰다:

“기도, 단식, 철야는 그것 자체로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실천들 속에만 우리 그리스도교적 삶의 목표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방법들이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이긴 하다. 그러나 참다운 목표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을 제대로 향유하는데 있다.”

때때로 그는 메시지를 더 단순하게 표현한다: “평화의 성령을 얻으라, 그러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당신 주변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분노라는 치명적 화살을 벗어나기 위하여

세라핌은 하느님만이 영혼을 따스하게 하신다고 가르쳤다:

"하느님은 마음과 내적인 부분들을 덥히고 불을 지피는 불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차가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다. ­악마는 본시 차가우므로­ 그 때에 주님을 부르자, 그러면 그분이 오실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완전한 사랑으로 덥히시고 그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따스함이 있기 때문에 선에 대한 미움의 냉기가 쫓겨날 것이다."

세라핌은 친절, 기쁨 그리고 다른 이들을 단죄하지 않는 것이 마음속에 하느님이 현존하는 징표들이라고 인정하였다:

"당신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게 부드럽거나 지나치게 친절할 수가 없다. 서로 엄하게 다루는 것조차 피하라. 기쁨, 빛나는 즐거움은 그것을 주는 사람의 얼굴에서 흘러나오고 받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기쁨의 불을 지핀다. 모든 단죄는 악마로부터 온다. 절대로 서로를 단죄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을 피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단죄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패를 바라볼 때 다른 사람의 그 어떤 것과도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늪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돌아서서 상대방의 잘못들을 비난하게 된다. 다른 이들을 단죄하는 대신, 내적인 평화에 이르려고 애써라. 침묵을 유지하고 판단으로부터 물러서라. 그러면 당신은 중상, 욕설, 그리고 분노라는 치명적 화살을 벗어날 것이며 모든 악으로부터 당신의 빛나는 마음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기도, 하느님께 주의를 돌려라

세라핌의 영적 삶의 핵심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다. 생의 후반기에 그는 보통 검은색의 수도복 대신 파스카색인 하얀색의 옷을 입었다. 어떤 계절 이든지간에 그는 방문객들을 파스카 절기의 감탄사로 맞이했다: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다!”라는 인사였다. 파스카의 기쁨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까지 변화시켰다. 그는 그의 영적 자녀 하나 하나에게 “나의 기쁨”이라고 불렀다.

1833년 71살에 죽었을 때, 세라핌은 하느님의 어머니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노동해왔고 하느님께 가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순수한 마음이 주어져서 그에게 다가가는 모든 사람들도 마음의 순수함을 향해 이끌리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그의 이콘에 입맞출 수가 없었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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