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새벽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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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새벽으로 가는 길
  • 한상봉
  • 승인 2017.09.1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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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J.M. Nouwen, 1932-1996 두번째 이야기

하버드대학교에서 헨리 나웬이 혼란을 겪고 있을 때, 프랑스 트로슬리에서 라르쉬공동체를 시작했던 장 바니에(Georges Vanier)로부터 마침 연락이 왔습니다. 라르쉬공동체에서 1년 동안 지내면 어떻겠냐는 초대였죠. 장 바니에는 스위스에서 태어난 캐나다 사람으로 파리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토론토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트로슬리에서 영적 지도자인 페레 토머스 필리페와 함께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창립했습니다. 라르쉬란 ‘방주’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떠밀려 다니던 사람들의 안전한 ‘집’이란 것이지요.

결국 헨리 나웬은 1885년에 ‘아무 자격이나 능력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환대해 주는’ 라르쉬 공동체에서 살기로 작심하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새벽’(Daybreak) 공동체에 아주 들어가 1996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살게 됩니다. 그곳이 ‘아버지의 집’이었던 것이지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멤버들이 모여 사는 이 공동체는 장 바니에가 세운 라르슈 공동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장 바니에

헨리는 자신을 그저 ‘한 사람’으로 받아준 데 대해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놀라움과 기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저명 교수나 지도자로서 남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은 아예 없습니다. 이들은 나웬의 책을 알지도 못하고,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장애인들이었지만, 연약하게 부서진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는 공동숙소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아담처럼 가장 장애가 심한 이를 돌보게 됩니다. 이는 마음을 다해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이었지요. 이전의 학구적 삶과 동떨어진 삶이었고, 달변가인 헨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 공동체와 우정을 배우고, 사람을 돌보는 직무에 전념했던 순간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무능함을 경험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형제가 됩니다. 헨리는 연설가, 작가, 상담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토스트를 굽거나 차를 끓일 줄 몰랐습니다.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에는 서툴렀던 것이지요. 다른 유명인사들처럼 특별한 재능 이외의 방면으로는 아주 무능했습니다. 헨리는 자신의 어려움을 감추지 않았으며, 드러내고 이 일들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전히 소년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헨리 나웬은 새벽공동체에서도 여전히 높이 날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었지요. 처음 도착 당시에 헨리는 새로 구입한 자신의 자동차를 선임자와 함께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흥분한 어조로 자기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던 그 순간, 갑자기 자동차는 어딘가를 들이박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임자가 말했습니다. “이 차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군요.”

헨리는 이 공동체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추구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단순함과 공동체의 사랑이 그에게 스며들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헨리에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여주는 복음서의 의미를 생생하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연인, 우정 가운데

헨리 나웬

헨리 나웬은 스스로를 사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평범한 신자 쪽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자기 이름의 가운데 이니셜 ‘J.M.'은 ’Just Me'를 뜻한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헨리는 보통 사람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상대방의 수준에서 대화하려고 노력했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친구로서 손을 내밀고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연인, 헨리나웬>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아일랜드 출신의 은퇴한 노동자인 마이클 플러드가 암에 걸려 죽을 날만 손꼽고 있었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잘 알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생면부지의 헨리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어느 친구가 플러드에게 물었습니다.

“나웬같이 훌륭한 사람이 자네처럼 촌스럽고 보잘것없는 노동자와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뭔가?”

플러드가 아일랜드 민요풍으로 답했다네요.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자네는 헨리 나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네.”

헨리는 성찬례에서 성배를 들어 올리는 순간 플러드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플러드는 암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여준 사랑과 우정이 죽음을 이기게 하였고, 그가 ‘하느님의 연인’임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연인은 가난한 모든 이들의 연인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헨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가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 때문에 항상 마음을 다쳤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없이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지위를 탐하는 이도 아니었지요. 그는 개방적인 사람이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자기 책을 주거나 나중에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꽃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들, 뜻있는 기획안을 들고 온 사람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환자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범한 관대함이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사랑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동성애적 사랑의 에너지가 그로 하여금 사람들과 맺는 친밀한 우정에 더욱 마음쓰게 하였으며, 그 딜레마를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는 법입니다.

 

toronto Daybreak

성체성사, 부서진 이들과 함께

헨리 나웬에게 가장 중요한 영감을 준 것은 성경과 성체성사였는데, 특별히 그는 새벽공동체에서 부서진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더욱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에게 성체성사는 단순히 가톨릭신자끼리만 나누는 배타적인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체성사를 예수의 삶과 소명의 핵심으로 이해했으며,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식탁에 앉도록 손을 내밀어 초대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에도 낮은 탁자로 만든 제대 앞에서 다른 이들과 나란히 앉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친교와 우정을 나눈 자리입니다. 그것은 빵을 집어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쪼개어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가정에서 매일 같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식탁이 제대가 되고, 우리의 음식이 성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신교 신자든 가톨릭 신자든 누구나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웬의 제대 곁에선 누구나 온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과 편안함으로 영성체를 합니다.

헨리 나웬은 2천년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존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가 오히려 예수를 더욱 멀리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복되는 예식과 기도문은 지루해지고, 소박함은 사라졌지요. <불타는 마음으로>에서 그는 “우리는 성체성사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의, 초, 제대 봉사자, 커다란 책, 추켜올린 팔, 넓은 제대, 성가, 사람들... 이 모두가 단순함과 평범함을 잃고 불분명해졌습니다. 예식을 진행하고 의미를 이해하려면 안내가 필요한 형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즉, 미사에서는 성체성사의 공적이고 조직적인 특성만 너무 강조하다가 결국 개개인의 삶과 맺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잔에 담겨진 삶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지 결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가 “너도 이 잔을 들겠느냐?”하고 물으실 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지 묻는 것이 성체성사라는 것입니다.

 

toronto Daybreak

축복할만한 생애, 그리고 죽음

헨리나웬이 라르쉬 공동체에 머물면서 가장 큰 축복은 모든 흠결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라르쉬 공동체에서는 초창기부터 음식을 나누고 밥 먹는 시간을 특별한 시간으로 삼아 왔습니다. 여기선 모든 순간이 특별한 날로 경축됩니다. 아롤로가 브라질에서 돌아왔다, 축하하자! 오늘은 안토니의 생일이다, 축하하자! 이제 성령강림절이니, 좋은 한 주를 보냈으니, 햇볕이 따뜻하니, 비가 오고 눈이 오니, 다함께 축하하자!는 것이다.

라르쉬 공동체는 특별한 성공과 출세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축배를 들고, 그밖의 사람들에게서는 인격을 박탈할 수 있는 냉담한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조차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였다.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애쓰고 시간을 할애하는 ‘라르쉬’는 세상에서 받은 모멸감을 제 것으로 내면화한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회복시켜주었지요. 그들의 일상은 모두 축복받을만 했습니다.

라르쉬 공동체는 ‘실제 이야기책’을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 책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책은 작은 스크랩북이 될 수도 있고, 사진과 편지, 회고담을 담기도 했습니다. 유명인사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들려줄만한 이야기’가 있으며, 모든 삶이 중요하고, 모든 삶은 나누고 축복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 책을 만들면서 자존감을 회복해 갔습니다.

“생일은 축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시험에 합격한 것이나 승진한 것이나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는 것보다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일을 축하는 것은 ‘당신이 있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생명을 고귀한 것으로 높이며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일을 맞이한 사람에게 ‘당신이 한 말과 한 일과 업적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와 함께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생일에 우리는 현재를 축하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불평하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추측하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생일을 맞이한 사람을 안아올리며 모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지금-여기)

그러나 삶만큼이나 축복할만한 사건은 죽음입니다. 1996년 헨리 나웬이 죽기 전에, 새벽공동체에서 헨리가 가장 먼저 돌보았던 아담이 그해 2월에 먼저 죽었습니다. 아담이 죽자, 헨리는 <아담: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Adam: God's Beloved)>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해지요. 아담의 생애를 알려지지 않은 기간, 광야, 공생애, 수난, 죽음, 장례, 부활이라는 예수의 생애에 맞추어 쓴 글입니다. 헨리는 아담과 같이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면서 유사한 점을 지적함으로써 예수와 우리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을 좁혀 놓았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예수는 힘과 권세를 가진 분으로 오지 않으셨다. 대신 연약함을 입고 오셨다. 예수의 일생 거의 대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담의 생애는 비록 그 자신과 그의 부모는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나자렛 예수의 생애처럼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아담이 제2의 예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극히 연약했던 아담의 삶을 영적으로 매우 뜻깊은 삶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담에게는 특별한 영웅적인 덕목들이 없었다. 신문에 보도될만한 그런 탁월함이 그에게는 없엇다. 그러나 나는 아담이 그의 연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선택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모두처럼 아담은 제한적인 사람이었고, 말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을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제한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사람의 인격체였고, 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연약함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특별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우리 기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다.”(아담)

그러나 헨리 나웬은 이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심장마비로 그해 9월 21일 이승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두 번에 걸쳐 이뤄졌는데, 토론토에서 장례식이 있기 전에 헨리의 시신은 새벽공동체 목공소에서 만들어진 관에 눕혀졌으며, 공동체 식구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여기 한 면에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하느님께서 내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신다. 그리고 밝은 빛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즉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특별하고 완전하게 사랑받고 있음을 보라고 재촉하신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나는 마침내 내 이웃을 나의 형제로,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헨리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토론토 새벽공동체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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